실향민 도시 속초 이야기

실향민 도시 속초 이야기

- 실향민의 도시, 속초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어 한스럽고
 오려고 해도 올 수 없어 한스럽다.”

 

    지금 속초 국민은행 연수원에서 한화리조트 방면으로 개설되어 있는 미시령로 부근. 도로가 나기 전에는 좁은 도로변으로 속초에 정착한 실향민들의 망향동산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함흥시민회, 길주명천군민회, 평안도민회, 북청군 신포읍민회와 원산시민회.  
  미시령로 길 옆에 자리잡은 함경북도 길주 명천군 망향비에 새겨진 단 여덟자의 한자로 쓰여진 문구. 단 여덟자로 실향민의 도시 속초에 정착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향동산에 묻힌 실향민의 한을 간명하게 잘 표현하였다.

  1983년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에서 펴낸 전국 최초의 인문지리 <한국의 발견>에서는 이 망향비의 문구를 인용하여 속초를 ‘실향민의 도시’라고 소개했다. 
    속초는 전국 유일의 실향민 공동체 도시이다. 마을 단위로 소규모 집단 실향민촌을 형성한 곳은 몇 곳 있지만, 도시 전체 인구의 70% 정도가 한국 전쟁 이후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으로 구성된 곳은 속초가 유일하다. 1960년대 어느 신문기사를 보면 속초 인구 구성의 70%는 월남한 실향민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수복된 속초에는 1951년 봄부터 1950년대말까지 실향민들이 다수 유입되었으며, 월남 실향민의 다수는 어업에 종사하며 바다에 인접한 시내와 청호동(속칭 아바이마을)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1930년대 동해안의 수산업 항구로 개발되어 도시가 처음 형성되었던 속초시는 한국전쟁 후 유입된 월남 실향민들의 정착으로 동해안의 대표적인 수산도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실향민의 유입은 속초시가 시로 승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속초시는 1963년 전국에서 26번째 시로 승격하였다. 승격 당시 속초시의 인구는 5만5천명으로 시의 인구 하한선에 모자랐지만 정책적 배려로 초미니 시가 되었다. 해방 후 이남 지역이었다가 한국전쟁 후 북한에 편입된 북한의 개성시는 1955년 직할시가 된 만큼 북한 치하에 있다 한국전쟁으로 수복된 속초지역에 대한 배려가 앞섰다. 

 

-  실향민의 도시 속초의 속내

 

  왜 속초에 그렇게 많은 월남 실향민이 정착하게 된 것일까? 그 동기가 궁금하다. 그동안의 학술 조사 결과 1950년대 초반 비교적 일찍 속초에 정착한 실향민들의 정착 동기는 △ 고향에 빨리 가려고  △ 바다에서 고기가 많이 나서 △ 아는 사람이 있어서 △ 군 관련 일을 하느라 (군 출신, 군부대 노무자 등)로 요약된다.

  보다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고향에 빨리 가려고 속초에 정착했다는 이야기는 그냥 표면상의 이유일 수 있다. 전쟁 중이거나 전쟁 후 정착 초창기에 속초에 정착한 실향민의 다수는 군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었다. 전쟁 중에 월남 피난민들은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기 쉽지 않고 군과 관련한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 남북한 교전이 교착된 1951년 봄 이후에는 전쟁 배후지인 속초가 군 관련 일이 많았다.

  실향민 정착 초창기에는 속초지역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은 신원이 확실해야했으며, 군과 관련된 민간인들이 정착할 수 있었다. 이들이 가족과 친지를 부르고, 같은 고향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후 속초지역의 여론을 주도하는 지역인사를 살펴보면 군 출신이 다수였다. 실향민의 도시 속초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과 관련된 자들이 다수 정착했으며, 이들은 속초시의 사회 지도층을 형성하고 안보 및 반공의식 고취에 큰 역할을 했다. 
  실향민의 도시 속초는 수복지구라는 특수성과 함께 반공의 교두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수복지구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반공이데올리기의 사상적 기지 역할을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보수정권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주었다. 
  월남한 실향민 출신이라는 신분적인 제약으로 남한에서 정착하려면 사상적으로 반공에 대한 투철한 생각을 가져야한다는 피해의식이 앞섰다.  


-  분단과 전쟁 트라우마

 

  실향민의 도시 속초는 어찌보면 집단화된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아니라 시대적으로 만들어진 집단 트라우마.

  실향민들의 분단과 통일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사고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통일을 염원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 의식이 강하다. 고향의 가족 친지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북에 남겨두고 자신 또는 가족의 일부만 내려왔다는 미안함도 함께 공존한다. 통일에 대한 염원도 강하지만 반공에 대한 강한 의지가 함께 표출된다. 이러한 이중적 의식은 실향민 문화 곳곳에 배어 있다. 
  이러한 분단 트라우마는 납북어부 사건과 간첩사건 등 남북을 둘러싼 갈등과 지역 경험 등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남북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지역에서 어김없이 개최되었던 규탄 궐기대회도 이러한 분단 트라우마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분단 트라우마 때문에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이산가족 상봉이 한창일때도 속초의 실향민 중에는 이산가족상봉을 주저한 이들도 많았다. 남북화해와 교류가 활발해 질 때도 북한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금강산 관광은 “북에 퍼주는 일”이라고 폄하하는 경우도 다수 있었다.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에 대해서도 대체로 소극적인 사람이 많았다. 분단트라우마는 피를 나눈 가족의 인연도 무시되는 강한 상처였다.

  실향민들은 월남 이후에 역사적,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회 전면에 남보다 앞서 나서지 않는 수동성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남북관계에서 정부의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예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결국 남북이 화해를 하고 대립과 갈등에서 평화와 협력의 관계로 발전해야만 속초 실향민들의 분단 트라우마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 2015년 9월 설악신문 "제2의 갯배를 찾습니다" 엄경선 속초향토사연구위원 원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