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소식

강원도민일보 7월 16일자 아바이마을 신문기사

4,559 2010.07.1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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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흔, 이젠 평화 위한 상징물로] 5. 속초 아바이마을
실향민 애환 갯배에 실어 나르며 희망 키워
 

 

속초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아바이마을’이다. 아바이마을은 대한민국에서 속초에만 존재하는 유일한 실향민 집단정착촌이다. 6·25전쟁 발발 60년이 된 올해, 아바이마을만큼 남북분단과 전쟁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곳은 드물다. 특히 아바이마을과 시내를 연결하는 무동력 운반선인 ‘갯배’는 아바이마을의 명물이자 실향민들의 아픔과 애환이 담겨 있는 대표적 상징이다..

  
▲ 아바이마을 주민들이 시내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무동력 운반선 갯배. 속초/김창삼



함경도 피난민 취락 형성 1966년 ‘청호동’ 개칭

1세대 70여명 거주… 드라마 촬영 명소로 부상




아바이 마을 유래와 역사

아바이마을의 정확한 행정구역 주소는 속초시 청호동이다.

청호동은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청초호를 사이에 두고 형성된 마을이다.

본래는 사람이 살지 않던 백사장으로, 일제시대에는 ‘반부평’이라고 불렸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후퇴 당시 함경도에서 남쪽으로 피난왔던 민간인들이 휴전이 되면서 고향과 가까운 속초에 모여 통일이 되면 북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람이 거의 살지않던 반부평 지역에 정착하게 됐다. 마침 임자없는 빈 백사장 지역인데다 바다가 가까워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여기저기서 실향민들이 모여 들면서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해 피난민들이 몰려살던 반부평 지역은 속초리 5구와 부월리 2구로 구분됐고, 1963년 1월 1일 양양군에서 분리돼 속초시로 승격된 후 1966년 1월 1일 동(洞)제 실시에 따라 속초리 5구와 부월리 2구가 ‘청호동’으로 개칭됐다.

당시 청호동 전체는 함경도 출신 피난민들이 많이 거주함에 따라 ‘어르신’ 또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함경도 사투리 ‘아바이’에서 ‘아바이 마을’이라고 별칭하게 됐다.

처음 아바이마을에 정착한 주민들은 사람 허리 정도의 깊이로 땅을 파고 창문과 출입구만 지상으로 내놓은 토굴같은 집을 짓거나 판잣집 등을 불규칙하게 짓고 살았다.

피난민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부분적으로 주택을 개축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속초시 통계자료에 따르면 1963년 1월 1일 속초시로 승격한 후 청호동의 인구는 1246가구, 6329명이었다.

1970∼80년대까지는 7000명 내외의 인구가 유지됐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어업부진으로 인한 주민유출이 심해지면서 2010년 6월말 현재 청호동에는 16개통 65개반에 2164세대, 4388명(남 2200명, 여 2188명)이 거주하고 있다. 16개통 가운데 9통∼16통지역이 현재 아바이마을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도 ‘신포마을’이라고 불리는 청호동 9통은 갯배 나루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방송국 드라마 및 예능프로그램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아바이마을을 상징하고 있다.

신포마을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읍 출신 실향민들이 많이 거주해 이름지어졌다.

아바이마을 거주 실향민들은 함경남도 출신이 90% 가량 이르고 있다.

이들 실향민들은 대부분 1·4후퇴 때 부산일대까지 피난갔다가 구룡포, 후포, 울진, 죽변, 묵호, 주문진, 양양, 대포를 거쳐 청호동에 정착했다.

현재 아바이마을의 실향민 1세대는 70여명에 불과하다. 지금은 실향민 2∼3세들이 중심이 돼 마을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은 1세대 대부분이 떠나고 얼마 남지 않은 아바이마을이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여유를 잃지 않았던 아바이마을의 자긍심과 풋풋한 삶의 모습, 소중한 삶의 역사를 지켜가고 있다.

특히 실향민 2∼3세대들은 10여년전 아사모(아바이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결성해 홈페이지를 만들어 마을의 참모습을 널리 알리고, 아바이마을 주민들의 화합과 소득증대를 위한 홍보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바이마을의 과거-고단한 삶의 흔적

과거 아바이마을 삶의 상징은 실향민들이 임시 거처로 나무 판자를 이어 얼기 설기 지은 판잣집이었다.

또 대문도 없이 좁은 골목길 바로 옆에 드러나 있는 방문을 열면 바로 안방이고 부엌인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길도 삶의 애환을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아바이마을 판잣집은 성인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 좁은 골목길을 마주보고 모여 있었다.

그런 좁고 작은 판잣집의 귀퉁이에는 어김없이 화분이 놓여 있다.

통조림 깡통이나 수산물을 담았던 나무상자에 흙과 연탄을 다져 넣은 화분에 고추며 화초들을 집집마다 심어 놓았다.

통일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던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판잣집에서 고기잡이와 거친 막일로 자식들을 키워낸 아바이마을 아바이와 오마이들은 높은 교육의식으로도 유명했다.

현재는 신수로 및 구수로 공사 등으로 옛 청호동의 가옥형태와 골목길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골목길 드문 드문 옛집 그대로 간직한 집들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청호동 아바이마을 골목길에서는 우리의 아픈 역사는 물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자식사랑과 강인한 삶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바이 마을의 현재-관광지로 각광

아바이마을은 지난 2000년 9월∼11월 방영된 ‘가을동화’라는 드라마의 촬영지로 더 유명해졌다.

탤런트 송승헌과 송혜교 등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이 드라마의 대표적인 촬영지가 바로 갯배와 아바이마을 해변이었다.

드라마 장면 중 각각 주인공들을 실은 두 척의 갯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교차하는 장면은 드라마의 주제를 돋보이게 했다.

주인공인 은서(송혜교)가 살던 집은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작은 기념품 가게가 되어 드라마의 낭만에 젖어보고자 하는 여행객들을 맞이했다. 지금은 순대국집으로 바뀌었다.

또 올해 4월에는 예능프로그램인 ‘1박2일’ 촬영이 갯배를 비롯한 아바이마을 음식점 일대에서 진행되면서 더욱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1박2일 출연진 가운데 1명인 가수 이승기의 외할머니가 실향민 출신으로 지금도 아바이마을에 살고 있다는 내용이 방송되면서 아바이마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바이마을이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전후시대를 살아온 우리 부모님들의 고단하지만 억척스러운 삶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실향과 분단의 아픔이 아닌 통일과 희망의 삶을 이야기하고픈 우리의 소망이 바로 이곳 아바이마을과 갯배에 실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바이마을의 미래-신포마을 고립 위기

속초시내와 연결하는 갯배가 위치한 신포마을은 아바이마을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곳이다.

이 아바이마을이 신수로 개설과 속초항 개발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신수로가 개통되면 신포마을은 섬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어 속초시는 수년 전부터 ‘신포마을 이주대책 및 관광선부두 종합위락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 이주에 필요한 속초시 차원의 예산조달이 어려워 국가 지원 없이는 사업시행이 어려운 현실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신수로가 개통되고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구수로 교량이 완공되면 아바이마을의 아름다운 해변 백사장은 모두 매립돼 선착장이 되는 등 신포마을 주변은 완전히 항만시설로 바뀌게 된다.

김진국 청호동 노인회장은 “신수로 개통으로 신포마을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속초에서 실향민의 삶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며 “이는 속초의 역사가 사라지고 삶이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아사모(아바이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관계자는 “아바이마을의 상징인 신포마을이 사라지는 것은 속초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며 “신포마을을 중심으로 실향민 테마마을을 조성하면 지역주민들도 먹고 살 길이 열리고 관광도 크게 활성화 될 것”이라고 밝혔다.

속초/김창삼 chskim@kado.net




■ 피난민 속초 정착 회고


15세때 피난길 올라 고생

60여년 생활 고향과 같아


  
▲ 동 문 성

전 속초시장

내 고향은 함경남도 단천군 복귀면 용포리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때 그렇게 갑작스러운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 지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다. 하루 아침에 누대에 걸쳐 살아오던 고향 땅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나이 열다섯살인 1951년 1·4후퇴 때 부모님을 비롯해 여섯 가족이 이불 두채와 쌀 두말, 그리고 재봉틀 1대, 양은냄비 1개만을 짊어지고 십리 밖의 정석진이라는 나루에서 창의배라는 목선을 얻어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일주일가량 항해해 주문진 항구에 입항했다. 당시 주문진항은 피난선으로 배를 댈 틈이 없었고, 육지에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우리 가족은 주문진 등대 부근의 함씨 성을 가진 집 방한칸을 얻어 살다가 열흘도 채 못돼 국군이 후퇴하니까 다시 남행길에 올라 배를 타고 삼척 정라진에 도착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계속 내려온다고 해 울진과 거제도를 거쳐 부산까지 갔다가 국군이 북진한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야, 고향 빨리가야 한다”고 재촉해 봄무렵에 주문진까지 다시 왔다.

전쟁이 교착상태를 보여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다가 1951년 11월 3일 38선 검문소를 피해 산을 타고 120리길을 걸어 속초에 도착했다.

속초에서 마침 폭격을 맞아 뼈대만 남은 집 한채를 찾아 군부대에서 버린 쌀가마니를 주워다 지붕과 벽을 만들어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 무렵 양양수산관리소(지금의 수협)에서 급사를 구한다고 해 운좋게 급사 자리를 얻었다. 급사란 말 그대로 사무실 청소와 직원들 심부름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온 식구들의 생활을 도우면서 살았다. 그러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됐다. 하지만 휴전은 곧 우리 가족의 귀향의 꿈을 접게 만들었다.

할 수 없이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9월 속초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면서 속초에 완전 정착하게 됐다.

속초중, 속초고, 중앙대학교 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기자생활, 재향군인회장, 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거쳐 지난 95년 6월 민선 속초시장에 출마해 당선된 뒤 내리 3선의 영광까지 얻었다.

15살 함경남도 단천군 소년이 포성이 울리는 속초에 정착한 뒤 60년의 세월을 붙박이로 살아오면서 이곳에서 부모님의 뼈를 묻었고, 고향 후배인 아내까지 맞아 손자까지 뒀다.

60년 전 함께 피난 나와 이곳에서 살고 있는 월남 동포 모두는 이제 속초가 고향이나 다름없이 정든 곳이 됐다. 정리 = 김창삼

 

출처 : 강원도민일보 7월 16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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