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꺼꾸러가는 오징어 -2탄

11,606 2011.09.30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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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는 그 주행 방법이 특이하다. 다른 물고기는 앞으로 전진하고 뒤로 후퇴할 때는 돌아서 가든지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그러나 오징어는 앞으로 가다가도 갑자기 뒤로 가는 신비한 생물이다. 오징어는 귀를 말고 뒤에 붙어있는 다리를 추진체로 삼아 유선형으로 만든 다음 앞으로 나간다. 그러다가 먹이가 있거나 뒤로 가야할 일이 생기면 귀를 추진체로 하고 다리를 유선형으로 만들어 꺼꾸러 나아간다. 양 방향이 자유자제로 움직인다. 고기를 잡다가 바다 속을 살펴보면 오징어의 주행에 감탄사가 나온다.

오징어 잡이 어선의 5만 촉광 이상 빛나는 집어등 밑에서는 바다 속 생태계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동해안은 물이 맑아서 먼 바다에서는 20미터 이상까지 비디오를 보듯이 고기들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다. 오징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작은 고기들을 잡을 때 딴청을 피우듯이 다른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마치 숙련된 야구선수들이 야구공을 캐취하듯이 지나가는 고기의 방향과 속도까지 계산하고 오징어의 엄지 두 발을 내밀어 낚아챈다. 꽁치나 고등어 같은 고기들은 오징어의 밥이다. 또 자기 보다 큰 고기들은 협공을 한다. 여러 마리의 오징어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딴청을 피우다가 일제히 대상 고기에 달라 붙어 제압하고 이빨로 조각을 내어 자기 몫을 떼어 간다. 이때 한 놈은 머리부분, 다른 한 놈은 양 옆 지느러미, 한 마리는 꼬리 부분.... 그리고 더 큰고기는 더 많은 오징어가 달라붙어 중간 부분까지도 물고 늘어진다. 여러 사자가 협공하여 물소를 넘어 뜨리는 광경이 바다 속에서도 벌어지는 것이다.

오징어에 대하여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는 것은 그렇게 빠른 꽁치의 앞길을 가로 막고 야구선수가 글러브를 끼고 공을 받듯이 두 발 사이에 고기를 낚아채는가이다. 그것도 뒤로 가는체 하면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서....
참 신비한 동물이다. 아니 창조주의 작품이다. 다른 고기들에게는 오징어는 괴물인 것이다.

그러나 오징어의 천적은 상어나 돌고래이다. 그렇게 활기차게 다른 고기를 잡는 오징어도 돌고래를 보면 벌벌 떤다. 붉은 자주색으로 다니다가도 돌고래를 보면 오징어는 갑자기 하얀 모습으로 벌벌 떤다.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 못하고 떠는 모습을 보노라면 웃음이 나온다. 돌고래는 별로 수고하지 않고도 오징어를 혀로 날름거리며 잡아먹는다. 돌고래가 나타나면 잘 잡히던 오징어가 갑자기 잡히지 않아서 뱃사람들은 돌고래의 출현을 싫어한다. 돌고래 떼가 지나가게 하려고 엔진도 끄고 집어등도 끈다. 그 때에는 한참 휴식을 취하곤 한다. 연일 오징어 잡이에 너무 힘들고 지칠 때 휴식하게하는 돌고래 떼가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오징어가 꺼꾸러도 가듯이 때로 인생도 이렇게 원하지 않는 방향, 꺼꾸러 가는 때가 있다. 아바이 마을에서 출세관은 공부가 아니다. 고기 많이 잡아 돈을 벌고 배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다.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뱃사람이 거의 다 되었다. 매일 배를 탔다. 취미 삼아 고기도 잡고 돈 버는 재미도 있고.... 또 대학을 포기하니 마음도 가벼웠다. 당시 자격고시인 예비고사를 준비하지도 않아도 되었다.
그 때(70년초) 예비고사는 전국 고등학생의 반 이상이 떨어지고 그 반이 대학에 시험 칠 자격을 얻는다. 그런 후 수준에 맞는 대학에 시험을 쳐서 들어간다. 나는 바다가에서 자랐고 보아온 것이 배인지라 해양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기왕이면 큰 배 선장이 되고 싶었다. 선장이 되면 돈도 많이 번다고 한다. 돈벌이도 잘되고 적성에 맞을 것 같아서 언젠가는 공부해서 꼭 해양대학교에 가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우선 돈 벌이가 급했다. 배타는 것이 엄마와의 약속이기에 지키는 것이었다.

오징어 배에서 있었던 일이다. 졸업 후 외삼촌 배의 사무장이 되었다. 사무장이라고 해야 뱃사람들의 어획고를 적고 팔아서 뱃사람들에게 분배 원칙에 따라 나눠주는 역할이다. 처음에는 한 두룸(20마리)을 잡으면 선주는 8마리 선원은 12마리였다. 70년대에 들어서는 기름 값을 감안하여 반 반이었다. 오일 쇼크 후에는 꺼꾸러 선주가 12마리 선원이 8마리였다. 불만도 많았지만 점점 기계화되고 오징어 어획량도 줄었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적어짐에 따라 명태 배처럼 전체 어획고에서 그 배당 원칙에 따라 나누어졌다.

나는 잡은 고기의 반이 자기 몫 일 때 사무장을 보았다. 사무장은 배 일을 본다고 해서 8마리를 내는 특권을 얻었다. 남보다 2마리를 득을 본다. 혼자 자식들과 먹고 사는 우리 엄마를 본다면 외삼촌이 배삯 전부를 면제해도 될 일이다. 배가 들어오면 내가 남보다 많은 고기를 잡은 것을 본다. 그 때마다 항상 외숙모의 붉으락 푸르락하는 눈치가 매서워 외삼촌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불만이 많았다. 배 삯을 다 주더라도 오징어가 잘 잡히는 1번과 2번 자리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거기는 선주의 아들이나 오징어 잡이의 프로급 만이 앉는 자리였다. 잘 잡히지 않는 기관실 옆은 속이 상하는 자리이다. 남들이 너댓마리 잡을 때 어쩌다가 한 마리 물어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새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들이 잠에 골아 떨어지면 빈자리가서 잡는다. 아침이 되면 수북히 쌓아 놓는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잠을 많이 잤으면 하고 기대한다. 선주들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참 이기적이었다.

졸업 후 군에 가기 전, 오징어 잡이가 업(業)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징어 떼를 쫒아 배는 점점 멀리 나가기 시작했고, 얼음을 배에 채우고 이틀, 어떤 때는 3일, 일주일씩 원양어업을 시작했다. 가을에는 울릉도가 거점이었다.

추석이 가까운 어느 날, 며칠을 작정하고 얼음을 채우고 공해상으로 배가 나갔다. 며칠 동안 계속 동북진하는 것이다. 아마 대화터(일본과 한국의 바다 사이에 있는 강원도 만한 대륙붕)인 것 같았다. 공해상이지만 위도 상으로는 북한의 원산이나 청진쯤 되었다. 북으로 갈수록 오징어는 매일 더 많이 잡혔다. 낮에도 가금 물었다. 망망대해에 밤이면 듬성듬성 오징어 집어등 불빛이 보였다.

그런데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각 배들의 연락망과 무선을 통해 들려 왔다. 빨리 피신하라는 명이 내렸다. 욕심 많은 선장들은 고기를 놔두고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지 계속 조업을 했다. 태풍 전야의 바다는 정말 고요했다. 바다가 호수 같이 조용하여 기분이 묘했다.
나는 바다에서 “날씨가 참 좋다”고 말했다가 선원들에게 얼마나 눈이 빠지도록 혼이 난 적이 있다. 미신인지 바다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날 바다가 조용해도 “좋다”고 말을 하지 않았다. 밤새 오징어도 많이 잡혔다. 미물 같은 오징어도 태풍 전야에 많이 먹이를 두려는지 사정없이 잡혔다. 태풍의 낌새를 알아차린 선장들은 물풍을 빼고 배를 몰아 앞을 다투어 울릉도를 목표로 나아갔다. 밤낮없이 가도 3-4일은 걸리는 거리이다. 태풍은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울릉도를 향하여 가는 이튼 날부터 큰 바람과 파도가 몰려 오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타던 남풍호에는 둘째 외삼촌이 선장이었다. 비를 동반한 파도가 심상치 않았다. 태풍권에 든 것이다. 외삼촌은 키를 사타구니에 끼고 그 비를 다 맞으며 파도와 싸운다. 끼니가 되어 밥을 해 먹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배가 얼마나 콩닥거리고 방아를 짓는 지 밥이 다 익었다 해도 비스듬히 설 익은 상태에서 멈춘다. 그래도 생 쌀을 먹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밥을 해서 외삼촌에게 드렸다. 파도에 파르르 떠는 배를 보존하기 위해서 빗물과 함께 서서 밥을 먹는다. 배 앞의 집어등들이 파도를 맞을 때마다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갑판 위는 물을 떠 먹을 때마다 잠수함이 바다에서 부상하는 것 같았다. 배 옆구리의 물구멍은 물이 미처 빠져 나가기 전에 또 다른 파도로 채워 있었다. 아직 울릉도에 닿으려면 온전한 하룻길을 더 가야한다고 했다. 통통 배를 타고 그 먼 곳을 향해 나가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각오한 행위인 것이다.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 살아 움직이다가 배가 넘어져 죽는 것이 더 뱃놈다울 것이다. 그래서 가는 것이다.

낮에 선장실에서 파도를 보니 높이가 정말 산 같았다. 아니 산이었다. 바람도 미친듯이 불었다. “이게 태풍이구나” 실감했다. 파도가 오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산이 굴러 온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산 같은 파도 굽이를 겨우 넘고 나면 통통배는 중심을 못 잡아 떨고, 파도의 파장 밑으로 내려갈 때는 사방이 금방이라도 덮칠 듯한 시퍼런 물 벽이었다. 다시 중심 잡고 파도 굽이를 향해 앞으로 나갈 때는 파도의 위엄에 배는 거의 서다시피 하거나 밀려 뒤로 미끄럼틀을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아 ! 바다 무서운 줄 모르는 뱃놈 하나가 이렇게 죽는구나” 멋 모르고 시작한 뱃사람 첫 입문 치고는 너무나 몸서리치도록 혹독했다. 다른 뱃사람들은 선장에게 운명을 맡기고 선실에서 잠을 잔다. 멀미가 심해 아예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누어있고, 심지어 대소변도 배 밑 칸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선장은 배 밖에 한 사람도 얼씬 거리지 못하게 했다. 파도에 휩쓸려 나가기 때문이다. 만약 파도에 휩쓸려도 건질 어떤 조치도 없다. 남은 자라도 살아야 하니까.... 배 전체가 파도에 내동이 쳐질 때는 “떵” 소리가 난다. 간담이 서늘해 진다. 오금이 저린다. 시이소를 타면 그렇게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나무배 밑 칸 틈새에서는 물이 쉴 사이 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굴러 다닐 수 있는 것은 다 굴러 다닌다. 사람도, 짐도, 낙시도, 잡아 논 오징어도....

밤이 가까워지자 더 살 희망이 사라졌다. 꺽는 파도의 흰 물살, 누가 파도를 낭만이라고 했는가? 밤에는 부서지는 그 흰 물살은 공포 그 자체였다. 파도 끝이 갈라진다. 이는 파도가 바람에 의하여 끝이 꺽기는 것인데 배가 여기에 휩싸이면 대부분 넘어 진다. 잘못된 주기의 삼각파도에도 배는 속수무책이다. 외삼촌은 자신을 밧줄로 묶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양 끝을 선장실 옆 구멍에 고정시켰다. 선장이 파도에 휩싸여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선장실에서 외삼촌을 도와 말을 시켰지만 이미 입은 굳어 있었다. 비장의 각오가 선 것 같았다.

나는 “오늘밤 우리 배에 탄 사람들은 다 제삿날이 같은 동기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오늘 밤 이 수 천리.... 좌표도 알지 못하는 동해에서 고기 밥이 되는구나” 궁상을 떨었다. 오징어를 좀 잡아 살아 보려고 애쓴 보람이 이게 아닌데..... 엄마가 통곡할 것을 미리 상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옆에서 파도의 구비를 넘길 때마다 지켜 보았다. 수 없이 넘고 또 넘고.... 넘을 때 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그 숨이 끝나기 전에 또 몰려 왔다. 공포가 극에 이르러도 졸음은 쏟아진다. 고속도로에서 졸면 죽는 줄 알면서도 졸며 운전하는 운전자처럼..... 자다가 깨도 선장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파도가 선장의 졸음을 깨우는 것이다.

다음 날 먼동이 거의 틀 무렵에도 바람과 파도도 여전했다. 다행히 통통배는 계속 통통거렸다. 새삼스럽지만 통통거려야 전부 산다. 배의 심장 소리가 멈추면 몇 분 되지 않아 우리는 표류하다가 바다의 원귀가 된다. 배가 태풍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았다. 한 낮에 어렴풋이 파도 속에서 울릉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섬은 가까운 것 같아도 몇 시간이다. 조금만 더 견디면 사는 데....
차차 파도의 강도가 전 같지는 않았다. 바람의 세기가 약하니 파도 끝이 하얀 물결로 갈라지지 않았다. 약간 안심했다. 그래도 끝이 좋아야 다 좋으니까 안심할 수가 없었다.

울릉도가 어느 정도 바람막이를 하고 파도를 제압한 것이다. 그래도 몇 시간의 사투 끝에 울릉도에 도달했다. 망망대해에 있는 울릉도가 뱃사람들에게는 관광의 명소가 아니라 생명의 피난처인 것이다. 항구에 도달해서 배 밑에서 나온 사람들을 보았다. 파가 뜨거운 물에 데쳐 나온 모습이었다. 축 늘어졌다. 며칠 세수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얼굴, 누가 다이어트를 돈 들여 하는가? 배부른 사람들의 소리지....하기사 배부르니까 살이 쪘겠지만..... 광풍을 만난 배에 태우고 며칠 지나면 몸무게, 아니 저울이 필요 없을 것이다. 태풍 속에 밀렸던 오줌을 바다에 갈기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뱃놈들을 보았는가? 육지에서 들으니 그 날 몇 척의 배들이 선원들과 함께 흔적없이 사라 졌다고 한다. 이래저래 서러운 뱃놈이여.....

파도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준 외삼촌이 그 날 따라 너무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다. 나라면 그렇게 며칠 밤을 세워 지켜낼 수가 있을까? 사는 게 무언데.... 그렇게 혼났으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며칠 후 바다에 나가 또 오징어 로라를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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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자님의 댓글

검정 기름때로 범벅이된 군인용 바지를 입으셨던  울 친정아버지는  기관장님 이셨읍니다...지금은  안계시지만, 정말  보고싶어집니다...선배님의글, 고향을 잊지않게해 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