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꺼꾸러가는 오징어 -1탄

10,387 2011.09.03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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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에서 70년 후반까지 아바이 마을은 오징어가 주는 풍요에 모두가 활력이 넘쳤다. 오징어나 명태잡이의 어선이 늘어났다. 부의 수단으로 배에 번호를 매긴다. 가령 원풍 1호, 2호 3호, 4호는 빼고 5호,6.7,8..... 배 이름도 풍어를 의미하는 ‘어풍호, 어흥어, 어복호... 고향을 그리워 붙인 단천호, 북청호, 함흥호, 청진호, 원산호, 마산호, 통영호, 울진호 .... 순풍에 안전을 기원하는 남풍호, 순풍호, 태흥호, 부흥호. 부영호,... 첫 아들의 이름을 붙인 길영호, 영생호, 철영호. 태준호.... 여자 이름은 없었다. 납자들은 여자 뱃속에서 나왔으면서도 권위를 세울 때는 굳이 애써 부인한다. 부정 탄다고.... 그런데 요즈음은 사람들이 없으니 소형선박에는 여자들도 배를 탄다. 부부끼리 어로 작업하는 배도 많이 늘었다. 격세지감인가? .

당시 아바이 마을에서 배 임자가 되는 것은 큰 자부심이다. 저축과 땅투기는 전혀 모른채.... 그래서인지 악착같이 벌어 배를 사는데 온 힘을 모은다. 빚을 내서 사거나 개미처럼 모아 사거나 인생의 목표가 오직 배 임자이다. 자녀들에 대한 비젼도 오직 배임자이다. 공부해서 출세를 시키거나 나은 미래를 향하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선주들은 아들이 선장이나 기관장이 되거나, 선주가 되는 것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 엄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처음 배를 타는 날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 잊혀 지지 않는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담임 선생님 덕으로 덤으로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나이가 들어 엄마와의 약속을 저 버릴 수 없었다. 고등학교까지만 다니고 돈을 번다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여름, 처음 오징어 배를 탔다. 배에 나간다고 하니 엄마가 그렇게 좋아 하신다. 드디어 엄마의 소원을 이룬 것이다. 우리 아들이 돈을 번다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였는지? 초보인 나는 잡아온 오징어를 건조하는 일만했지 어떻게 잡는 방법을 몰랐다.
배타는 첫날, 둘째 외삼촌의 배에 탔다. 배 이름은 ‘남풍호’였다. 그 배에는 사촌인 상근형도 탔다. 중학교를 나와서 배를 탔으니 나보다 6-7년 경력이 앞섰다. 형은 나에게 오징어 낚시를 묶는 법, 로라를 설치하는 법. 오징어 잡는 요령을 가르켜 주었다. 그리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바다에 나가 직접 겪어 보면 안다고 했다. 베타는 입문의 첫 걸음은 멀미이다. 먼 바다에 나가면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이 멀미이다. 참으로 신기하였다. 배탄 경력이 나보다 오래된 사람들도 몇 시간 바다에 나가면 다 비틀거리는 데 나는 잘 견뎠다. 배를 탄 첫 날. 파도가 어느 정도 있었는데 멀미를 별로 하지 않았다. 체질인 것 같았다. 육지에 내려와서 서 있으면 온 세상이 다 흔들리고 출렁거리고 비틀거린다.
그래도 다음 날 또 나갔다. 며칠이 지나니 금방 적응이 되고 이제는 제법 오징어도 몇 두룸 잡았다. 팔아서 처음 돈을 벌었다. 엄마에게 주니 엄마의 기쁨이 시작된 것이다. 아침에 배에서 들어 올 때면 엄마는 기다리다가 내가 잡은 오징어를 살피고 즐거워하신다. 남보다 더 잡기도 한다. 욕심이 많아서 밤 잠을 자지 않고 잡아서다. 엄마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은 나로선 효도였다. 아들이 돈을 번다는 것이 엄마에게는 더 말할 수 없는 행복인 것이다. 이 행복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나는 매일 배를 탔다.

당시 담임 선생님에게 오징어 잡으려 나간다고 보고하고, 오후에는 배를 타기 위해 조퇴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간다. 갯배를 타고 집에 오자마자 낙시 도구를 챙겼다. 다른 돈에는 인색한 엄마가 오징어 잡는데 드는 비용은 흔쾌히 허락한다. 속이 보인다. 25-30개를 연결해서 묶은 오징어 낚시와 로라, 그리고 물레, 복어를 잡기 위한 긴 대나무, 작은 산자꼬(낱마리의 오징어를 잡기 위한 도구), 장화, 비옷, 그리고 밤에도 추위에 대비한 두툼한 헤드레 옷들과 모자, 항고에 싼 도시락.... 준비가 한 두 개가 아니다. 한 광주리이다. 광주리에 여러 낚시도구를 꾸역꾸역 담고 배로 나간다. 승선이 확인되면 출발선상에 선 선수들처럼 항구 안의 수백 척의 오징어 배들이 한꺼번에 좁은 포구 안을 빠져 나간다. 통통거리는 소리, 검은 연기, 고함소리, 욕소리, 당시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일본식 선박 용어들을 쓰면서... 아시당, 고에, 도모, 나라시, 빠구....

70년대 당시는 육지에서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거리의 바다에 나간다.
선장들이 오징어가 있음즉한 바다에 도착한다. 그러면 먼저 해류에 떠내려가되 바람 방향과 배를 어느 정도 고정시키기 위한 소위 물풍(물 닻, 배 낙하산)을 바다에 던져 넣는다. 동해는 너무 수심이 깊기에 닻을 사용할 수 없다. 그 작업은 노련한 선장과 선원들이 바람과 해류 상황을 살펴보면서 넣는다. 줄까지 하면 4-50미터의 대형 낙하산이다. 어느 정도 팽팽해지면 배가 일정하게 떠내려가게 된다. 물풍을 넣고 고정이 되면 배는 바람 반대 방향으로 고정적으로 서 있게 된다. 물풍은 파도가 와도 어느 정도 유동성 있는 닻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 조류가 심할 떼에는 100리까지 떠 내려 간다고 하니 항상 월선 조업에 신경을 쓴다. 당시 좌표의 기준은 각 등대마다 특색있게 반짝이는 불빛이다.

물풍을 놓고 나면 뱃사람들은 각자 조업 준비를 한다. 평균 23-5명의 인원이다. 왼쪽에 11명, 오른쪽에 11명, 그리고 배 키가 있는 중앙에 한사람이 더 앉아서 23명이 정원이다. 배가 더 크면 25명이다. 오징어는 제일 배 꼭대기, 뱃머리에 2명이 앉는다. 오른쪽 보다는 왼쪽이 더 잘 물린다. 오징어가 잘 잡히는 순서는 왼쪽 1번자리, 그리고 3,4번 순서이다. 중간 기관방 이 있는 7,8번자리가 제일 안전하지만 오징어가 잡히지 않고, 뒤로는 10번11번이 잘 잡힌다. 나는 초보라서 항상 7,8번 자리이다. 배나 노력을 해도 결산은 언제나 반 타작... 그래서 수익을 올리는 것은 밤잠을 자지 않고 근신하면 그 수확을 만회하곤 했다.
배가 정착되면 로라를 설치하고, 낚시를 감고, 복어 잡이용 대나무를 설치하고, 비가 오든 안 오든지 상관없이 비옷을 입는다. 그리고 저녁에 해가 늬엿늬엿 질 때가 되면 서둘러 저녁을 먹는다. 각자 싸온 도시락을 삼삼 오오 친분있는 사람끼리 먹는다. 기관장은 조명을 밝히기 위해 기관실에서 그 시끄러운 엔진을 돌리고 제네레이터에 전기를 생산해서 불을 밝힌다. 밤에 점검보다는 밝을 때 하는 것이 나아서 그렇게 한다. 밤에 바다에 핀 오징어 잡이용 불꽃을 보노라면 그 수에 놀라고, 그 밝기에 놀라고, 그 밑에 몰려드는 고기와 수중 동물의 세계에 놀란다. 저녁을 먹고 나서 몇 몇 사람들이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워밍업으로 바다에 로라 낚시를 집어 넣은 후 물레를 돌리기 시작한다.

오징어는 대체로 밤이 되어야 물지만 초저녁 오징어가 물 때도 있다. 어쩌다가 근처를 지나가던 오징어 떼가 낚시에 물리기 시작하면 배안은 온통 비상이다. 먹던 밥을 다 팽개치고 일제히 바다에 오징어 낚시를 물레질하여 바다에 풀어 넣는다. 적어도 5-10분 이상이 걸린다. 성격마다 천차만별이다. 급히 넣다가 도리어 낚시가 엉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분히 넣는 사람도 있다. 오징어는 떼로 지나다가 갑자기 문다. 오징어는 성격상 줄줄히 한 사람의 낚시에만 일제히 달라 붙는다. 그러기에 그 요행을 바라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돌리는 것이다. 말은 못하지만 영물이다. 부지런한 사람을 알아 본다. 오징어 잡이 작업은 완전 중노동이다. 저녁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돌려야 한다. 수동으로, 어깨 뼈마디에서 물집이 생길 때까지....

줄줄이 걸려온 오징어는 물과 먹물을 사정없이 쏘면서 배 갑판 위에 나뒹군다. “뻐억 뻐억뻑 뻑뻑” 거리면서 나뒹군다. 처음 대하는 육지 위로 올라온 분통을 먹물세례로 몸부림친다. 한편 작은 가짜 미끼에 속아 올라온 것이 억울한지 오징어 색깔이 불그락 푸르락 거리면서 온갖 성질을 다 내보이면서 허공에 날개 짓을 한다.
그러나 ‘네 놈들이 잡혀야 우리가 먹고 살고 자식들이 공부를 한다’. 나는 엄마를 기쁘게 해야 한다. 오징어를 잡고 아침에 들어오면 다 팔고, 그길로 아침을 부랴부랴 먹고 학교에 간다. 학교에 가면 졸리지 않을 수 없다. 밤을 샜으니 당연하다. 당시 정상발육을 하지 못한 나는 키가 작아 항상 앞줄에 앉았다. 뒤에서는 조는 것이 묵인되거나, 요령을 피울 수 있지만 앞줄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 때로 꿈같은 꿀 잠 중에 청천벽력 같은 출석부 세례가 쏟아진다. 앞줄은 출석부 사정거리이니까...... 담임 선생님을 제외한 다른 교과목 선생님들은 내가 오징어 배를 타면서 공부한다는 사실을 모른s다. 단지 조는 학생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피눈물이 고일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오후가 되면 신났다. 그렇게 재미있는 오징어 잡이에 대한 기대, 돈이 생긴다는 기대, 엄마가 또 기뻐할 것이라는 기대, 다시는 가정교사로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실은 오징어 배를 다니기까지 항상 나보다 아래 학년의 동네 후배들을 가르쳐왔다. 가정교사라는 것이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인가? 당시는 돈을 제 때 주는가? 요금이 비싼가? 겨우 교납금이 해결될 정도이니.... 항상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학교를 다녀야 하니까 그 일을 했다.
그러나 오징어 잡이는 그 춤추는 오징어의 발동작이 마력을 발휘한다. 바다로 오라고.... 열배 이상의 돈을 벌 수 있고, 매일 돈이 생긴다는 기쁨이 있고, 바다의 탁 트인 공간과 바다 내음이 스트레스 해소에 그만이고.... 졸다가 출석부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오징어 잡이에는 그만한 매력적인 가치가 있었다.

시험 때 있던 일이다. 그 때도 바다에 나갔다. 오징어를 잡으면서도 깨알 같은 영어 단어를 옆에 끼고 외우면서 무의식적으로 로라를 돌렸다. 입으로는 중얼중얼... 눈은 바다 밑에서 낚시를 물고 올라오는 오징어를 살피면서.... 그런데 어느 날 선창에 부딪히는 파도에 영어 단어장이 떠내려갔다. 로라를 멈추고 시험 칠 그 단어장을 바다에서 꺼내려고 일어섰다. 갈고리를 잡아 낚아 실랭이를 치면서 겨우 건져내었다. 그런데 선원 한 사람이 야단을 친다.
“이놈아 뱃 놈이 바다에서 무슨 공부냐? 우리처럼 고기만 잡든지 공부할려면 뱃놈을 때려 치우든지 할 것이지.... ”
건진 단어장을 강한 집어 등 불빛에 말리면서 단어를 외었다. 그런데 나중에 올라온 오징어란 놈이 또 심술을 부렸다. 그 단어장에 먹물을 뿌려 먹통이 되었다. 로라를 돌리면서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 보았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에서도 날개 짓을 하며 살아가는 갈매기들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갈매기들이 그 아픔을 아는지 같이 울어 주었다. 학교에서 졸다가 머리통에 혹이 나도록 선생님에게 출석부를 가로 새워 얻어 맞고 , 바다에서 선원에게 공부한다고 욕을 먹고, 올라온 오징어 에게는 먹물 세례만 받았으니....

그 날 나는 눈물을 머금으면서 결심하기를 ‘그래, 나는 꼭 대학에 갈꺼야, 언제인지 몰라도 갈꺼야, 때가 되면 가게 될꺼야....’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그 이튿 날은 난생 처음으로 제일 많은 오징어를 잡았다.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었다. 아에 로라가 돌아가지 않았다. 낚시 바늘이 내려가기 전에 다 물고 그 무거운 추가 바다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낚시 25개를 다 물고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 올라오면 안도의 한숨을 센다. 왜냐하면 너무 무거워 줄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밤 낚시가 없어서 잡지 못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 후론 그렇게 많이 잡아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 배에서 제일 꼴지 축에 드는 데도 33두룸, 660마리를 잡았다. 뿅 갔다. 흥분의 아데날린이 온 몸을 적신 날이었다. 밤새 오징어들이 날 잡아 달라고 배 옆에서 몸부림을 쳤다. 오징어 잡이가 그 날만 같아라. 지금은 할어 한 마리에 만원이라니.... 아무리 계산을 못하는 사람이라도 부자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겠지? 그렇게 시작된 학생 어부는 오징어처럼 꺼꾸러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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