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초딩추억시리즈24-명태(낚시배와 엄마의 눈물)

13,508 2010.05.3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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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에 관한 사연은 그 수많큼 많고 다양할 것이다. 이제 명태에 얽힌 낚시 이야기와 명태에 얽힌 엄마의 눈물을 말하고자 한다.

악어와 악어새는 공생의 관계를 이룬다. 악어는 큰 짐승을 잡아먹고 악어새는 악어 이빨 사이에 낀 잡고기를 빼 주면서 먹고 산다. 명태 낚시 배는 고기 잡는 사람과 뒤에서 낚시 일을 해주는 사람들로 콤비를 이룬다. 그런데 이 낚시 일은 주로 배 타는 선원들의 식구들이 감당하고 일손이 부족할 때는 삯일로 맡긴다. 그 삯일은 주로 가난한 집, 식구들이 많은 집, 아비 없이 혼자 사는 집의 아이들이 맡아서 일한다. 다른 사람들은 부업이지만 우리 집은 낚시 일이 주업이다. 겨울이면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우리 집 식구 6명(엄마 포함)은 통영에서 온 백구호 선장의 것과 다른 선원의 반 짓을 더해 3함지를 책임 맡아 일했다.

명태 잡이는 보통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다. 명태 배가 잡은 수입은 선주가 공동경비를 제하고, 보통 10등분하여 선주는 3, 선장 1.5, 기관장 1.5, 나머지 4는 선원들 4명이 나눠 가진다. 그 중 낚시 사공(갑판장)은 뒷방에서 조금 더 받는다. 뒷방은 잡은 명태를 조합의 경매에 올리지 않고 선원들의 회식비와 아낙네들의 임시 생활비로 큰 대태(大太)를 남겨 두었다가 비공식으로 팔아서 쓴다. 선장도 알고 선주도 알지만 눈감아 주는 비용이다. 너무 많으면 선주에게 미움의 눈총을 받기도 한다.

대태가 육지로 던져지면 제일 반기는 사람은 선원의 아내들과 아이들과 엿장수이다. 아이들은 부둣가에서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던져준 명태 몇 마리를 들고 엿장수에게 간다. 엿과 물물교환용이다. 추운 날씨에 굳어진 가락엿을 갑자기 끊으면 구멍이 송송한데 그것을 불어서 구멍이 크면 보너스도 받는다. 엿치기의 재미가 어린 동심을 유혹했다. .
또 육지에 던져진 대태는 전문으로 장사하는 아줌마들이 산다. 알과 내장을 빼어 팔고 덕장에 널어서 말린 다음에 이익을 남긴다. 엄마와 같이 장사하는 아줌마들은 주로 우리 집 덕장에 가져와 배를 따서 말려 판다. 때로 우리 형과 그 친구들이 화투를 치던지 용돈이 궁할 때 손을 대는 비공식 수입원이기도 한다. 워낙 명태가 많아서 없어진 것도 모른다. 엿가락 몇 개가 나의 입을 막는 뇌물이다. 이래저래 풍성한 명태는 여러 사람을 살렸다.

낚시 일은 초겨울에 낚시를 꾸미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11월이 되면 알낚시를 맨다. 이는 낚시에 30-40센티미터의 보채(목줄)를 매는데 250개씩 묶는다. 묶은 것은 벽에다 가지런히 걸어 놓는다. 보채의 길이가 어릴 때는 왜 그리 길어 보이는지.... 낚시가 원줄에 엉켜 감긴 것을 풀려면 팔이 짧아 낚시가 턱에 걸리곤 한다.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잡는다. 8살 때부터 낚시 일을 했으니 지금 인도나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이 양탄자를 짜기 위해 일터에 내 몰린 것이나 그 상황이 다르다고 볼 수 없다.

다음은 보채에 맨 낚시를 원줄에 묶는 작업을 한다. 60-70센티 간격으로 보채가 달린 알낚시를 원줄 가운데로 꿰서 한 개씩을 묶는다. 나이롱이라 서 밀리지 않기 위해 속을 꿰어야 한다. 250개를 묶는다. 그러면 낚시 한 틀의 길이는 150미터를 넘는다. 이렇게 묶은 틀을 4개씩 미끼를 끼면 한 함지를 이룬다. 그 함지를 선원 한 사람당 2개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 총 개수는 2함지*6명=12함지... 배 한 척당 바다에 하루 뿌려지는 낚시는 10킬로미터의 범위로 뿌려지는 셈이고, 미끼 달린 낚시만도 배 한 척당 만 2천개쯤 뿌려지는 것이다. 고기를 좀 잡는 날이라도 전체 낚시의 10퍼센트의 미만의 확률로 명태가 무는 것이다. 어군 탐지기도 없던 시대에 감으로 수심을 재고 바다에 뿌려진다. 그러니까 뱃사람들에게는 짧은 겨울 낮 동안 바다에 낚시를 던지고 다시 건져 올리는 것만 해도 하루가 벅찬 것이다.

원줄은 처음에는 면사였지만 나중에는 나이롱 줄이 되었다. 질기고 좀처럼 끊어지지 않고.... 그런데 이 나이롱 원줄은 축항이나 모래 백사장에 꼬이지 않도록 되푸는 작업을 거쳐야 낚시를 맬 수 있다. 추운 겨울날 줄을 풀었다가 당기고 감아오는 일도 만만치 않는 작업이다. 손을 호호 불어 가면서 새 원줄을 푸는 일은 형과 나의 담당이었다.

낚시를 끼우려면 좁은 대나무를 반으로 자르고 다듬은 ‘쪼비대’가 필요했다. 길이는 50센티 정도, 굵기는 낚시 하나를 걸칠 넓이로 2센티 정도가 된다. 낚시가 잘 들어가도록 입구를 비스듬히 깍아서 만든다. 이 대나무에 낚시를 가지런히 집어 250개를 넣는데 3묶음 단위로 묶어서 한 ‘초록’을 만든다. 때로 ‘쪼비대’는 매 맞는 도구도 되었다. 일하기 싫어 꾀를 부리거나 투정하면 우리 집의 군기 반장인 큰누나에게 이것으로 혼쭐나게 맞기도 했다.

우리 집은 좁아서 하루에 3함지가 동시에 바다에서 들어오면 방안이 꽉 찼다. 잠자리도 없다. 각자 한 함지씩 꼭 일하고 자야 한다. 한 함지 당 4시간이 걸린다. 밤늦게까지 일하든지 새벽에 하든지 꼭 해야만 한다. 누나들은 그전부터 했지만 나는 8살부터 20살까지 13년을 했으니 지겨웠다.
큰 누나는 낚시를 새롭게 묶는 삯일을, 작은 누나와 형은 각각 한 함지씩, 나와 동생이 한 함지..... 어리다고 예외는 없다. 모질게 살았다. 추운 겨울 난방은 숯을 피워 얼은 손을 불어 가면서, 때로 숯 냄새에 어리고, 김치 국을 먹어 가면서.... 전기도 없이 호야불로 불을 밝혀 가면서.. 그을림이 낀 호야를 닦아내고, 석유 등잔 기름을 채우고.... 비상 초도 준비해 놓고....

명태 배가 나간 날, 낮에는 삯일 하는 사람이나 선원들의 집은 바쁘다. 소위 낚시를 ‘찍는다’고 하는데 먼저 일찍 일어나 미끼를 썬다. 0.5센티 두께로 비스듬히 자르면 2센티 짜리 미끼가 된다. 약 3,000개의 미끼를 썰어 놓아야 한다. 지금처럼 자동 컷팅기가 있었으면..... 하기사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에 무얼 기대하는가?

우리 작은 누나는 요즈음 TV의 달인들보다도 미끼를 더 빨리 썰어 놓는다. 손이 보이지 않는다. ‘다다다....닥’ 하면 벌써 썬 미끼가 수북히 쌓인다. 나는 미끼를 썰기 싫어서 칼만 갈아 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도 칼만 갈아서 먹고 살아도 될 수준이다? 가끔 아내가 칼을 갈아 달라면 솜씨를 발휘한다. ‘어디서 배운 실력이냐?’고 물으면 나는 당근 ‘아바이 마을 고생표’라고 말한다.
미끼를 써는 데는 칼이 생명이다. 무쇠 칼도 선뜩 선뜩하게 갈아야 한다. 예리하게 잘 갈아졌는가를 보려면 손으로 칼날을 스쳐보면 안다. 소름이 올 정도로 선뜩해야 된다. 이렇게 간 칼로 미끼를 써니 빠를 수밖에....

명태 미끼는 대체로 양미리를 사용한다. 가을에 장독에다가 소금에 잘 절여야 하는데 양미리 목을 자르고, 알을 빼고, 소금을 친다. 큰 독을 여러 개 채운다. 염도에 따라 명태가 차별을 한다고 한다. 우리 누나들은 그 염도를 잘 맞추어 다른 사람들의 낚시 미끼보다 명태가 더 잘 문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나는 속으로 그 칭찬이 우리만 골병든다고 불평이다. 왜냐하면 명태가 많이 물면 낚시 일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엄마는 기왕이면 남의 일이라도 잘 해주는 것이 복 받는 길이라고 성인군자 같이 말하신다.
명태가 좋아하는 미끼는 꽁치이다. 비린 맛이 많고 번쩍이며 빛을 내기에 다른 고기들도 좋아 한다. 그러나 출렁이는 파도에 살이 연하여 미끼가 바늘에서 잘 떨어진다. 춘태가 날 때 양미리가 떨어지면 봄 꽁치가 양미리를 대신한다. 오징어는 질겨서 떨어지지 않지만 낚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지저분하고 낚시에서 잘 빠지지 않고 미끼를 팔아 생기는 부산물도 없다.. 학교 다닐 때 나의 교복은 유난히 번들거렸다. 그것은 작업복이 곧 교복이니까 낚시 미끼에 쩔어서 번들 거렸던 것이다. 지금도 고마운 것은 그것을 탓하지 않고 받아준 선생님들이다.

명태도 차별을 하면서 문다고 한다. 멍청한 놈 같아도 낚시 줄이 새 것과 헌 것이냐에 따라 다르고, 미끼도 맛이 갔는지, 새것인지, 소금에 잘 절여 졌는지, 잘 썰어서 먹기 좋게 만들었는지에 따라서.... 맹한 것 같아도 영물이다.

명태가 많이 나던 어느 해, 우리 집 덕장에는 명태로 뒤범벅이었다. 아래층, 2층 고랑대에도 가득했다. 엄마가 억척같이 장사해서 돈을 벌었고, 우리들이 눈을 비벼가면서 낚시 일을 해서 번 돈으로 틈틈이 사서 걸어 놓은 작품이었다. 아니 전 재산이었다. 덕장에 걸린 명태를 바라 볼 때마다 흐믓한 우리의 미래였다. 고생한 큰 누나의 시집 밑천이고 대학에 가게 될 형의 등록금이다.
명태가 한 겨울 덕장에서 황태가 되고 나면 내려서 판다. 싸리에 끼우기 전에 눈알을 뽑는다. 50년대 초에는 눈알을 뽑았지만 60년대 중반부터는 뽑지 않고 팔았다. 우리 명태도 그렇게 내려져서 30두룸 씩 한 짝을 이루어 끼워졌다. 몇 십 짝이 되어 마당에 갑바를 덮어 겨울 내내 명태 낫가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수많은 니어커가 집 마당에 들락거리더니 마른 명태가 어디론지 다 팔려 나갔다. 어려서는 돈이 어떻게 생기는지, 집안 재정권에는 감히 묻지도 관심도 없었다.

어느 날 그렇게 건강하던 엄마가 며칠째 드러누운 것이다. 일도 나가지 않고 밥도 드시지 않았다. 큰 누나는 걱정이 되어 엄마에게 무슨 일이야고 묻는다. 강한 엄마만 보아 왔고 억척같이 살아온 엄마만을 보았던 우리로서는 충격이었다. 아파서 누운 엄마를 본 적이 없는데 며칠째 장사도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이다. 밤마다 끙끙 앓으신다. 외삼촌들이 찾아 와서 묻는다. 큰 누나가 물어도 대답이 없다.
몸은 점점 쇠약해 지셨다. 병원에 가보라고 해도 병원에 갈 병이 아니라고 한다. 도체 무슨 일인지.... 5남매가 울면서 “엄마 밥 먹어, 안 먹으면 죽어! 말을 해 봐요. 뭣 때문이예요...” 애원했다. 거의 일주일을 그렇게 씨름하다가 얻어낸 사실은 남보다 마른 명태 값을 비싸게 값을 쳐주던 사기꾼(모든 사기꾼이 그러하듯이)에게 말려 든 것이었다. 그것도 동네 사람에게..... 형의 동창 아버지에게.... 서울로 이사하려고 작정하고 물색하던 중 우리 엄마를 고른 것이다. 피 눈물로 모은 명태를 전부 착복하고 서울로 도망을 친 것이다. 훗날 이야기이지만 그 사기꾼의 자녀가 백혈병에 걸리고 자신은 못쓸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한다. 먹을 것을 먹어야지.... 하늘도 과부의 돈은 함부로 못하는데....
정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딸이 시집갈 돈이요 아들을 공부시킬 돈이며,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또순이처럼 살아서 모아온 재산을 하룻밤에 날린 것이다.

우리 5남매는 그날부터 엄마에게 매달렸다.
“엄마, 제발 죽지마..... 제발 밥을 좀 잡수셔요”.....
“우리가 있잖아요”
“더 열심히 벌면 되지 않아요”.
“다시 시작해요”
“돈 없어도 여태 살아 왔잖아요”....

엄마가 없는 우리 집은 상상도 못했다. 울음바다였다. 돈보다 우리에게는 엄마가 전부였다. 절망으로 사경을 헤매던 엄마를 별의별 말로 설득을 했다. 다시 회복되는 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명태야! 너는 우리 엄마의 눈물을 아느냐?
명태야! 그 숫한 사연을 가진 네가 자취를 감췄으니...

댓글목록

조카님의 댓글

조카 이름으로 검색 2010.06.07 00:00

외할머니 생각납니다. 생선 장사, 리어커 끄시던..어릴 때 용돈이 떨어지면 외할머니 찾아가 손 벌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살아생전 자식들 위해 좋은 일 많이 했기에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지 않을까요..

갈매기사랑님의 댓글

봄비가 내려서 인지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BR>우리 부모님들 정말 대단하셨고 지금도 대단하세요.<BR>제가 힘든 일이 있을때마다 그때그때 잘 극복할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아바이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생각을가끔 하게됩니다.<BR>아바이 마을에서 태어난 것이 저에게는 로또보다 더 큰 행운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