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대학원합격수기가 엄마의 눈을 고치다

4,016 2014.12.1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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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잡으러 갔다가 북에 끌러갈 뻔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더 현실적인 것은 당장 등록금과 기숙사비, 방송대 3학년 2학기 교재와 수업료....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동안 오징어 잡은 것 가지고 겨우 신학교 수업료의 일부 밖에 되지 않았다.

    서울 기숙사로 돌아와 매일 하던 대로 새벽기도하고 아침에는 학교마당을 뛰었다. 돈도 없는 놈이 건강이라도 해야지, 객지에서 아프면 누가 동정이나 할까? 그런 심정으로 열심히 학교 운동장을 체바퀴 돌듯 돌았다. 훗날 학교 마라톤에서 부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저 뱃놈이 언제 저렇게 잘 뛰지? 놀라게 만들었다. 숨은 노력 앞에 이기는 장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가 보다. 경동시장 쪽에 개척교회에서 파트전도사, 즉 시간제 신학생을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접을 거쳐 미완성 전도사로 9월부터 일했다. 어린이 학생 파트를 담당하고 10만원씩 받기로 했다. 알바자리가 난 것이다. 2학기 신학교 기숙사비도 외상, 수업료도 외상, 없으니 배를 째라고 학교를 다녔다. 생기면 낸다는 조건으로 다녔다. 외상이 안되는 방송대 수업료는 오징어로 번 돈, 얼마 가지고 해결을 했다. 오랫동안 외상으로 공부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교수 중 나이 많으신 안희국 농어촌 담당 교수가 사정을 알고 나를 불렀다. 배를 타면서 수업료를 마련한다는 것을 알았다.

 

  “전에는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닌 것을 아는데, 데모가 나서 이번학기는 장학금 없는데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바다에서 일어난 일을 말했다.

“죽을 뻔 했습니다. 북에 납북 직전에 우리 군함에 의하여 살아왔습니다. 돈은 고사하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고 돌아 왔습니다.”

 

  교수님이 사비를 아껴서 나에게 봉투를 준 것이다. 수업료의 반이었다. 그래도 감사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에 남의 수업료를 대 주겠는가? 나는 대학에 가서도 좋은 선생님들의 신새를 지는가보다. 이 돈 저 돈 털어 모아서 2학기 중간에 교무실 창구로 갔다. 아직 10만원이 부족하지만 있는 것이라도 놔두면 쓸 것 같아서 얼른 갔다. 창구의 아가씨에게 늦게 수업료를 마련했는데 좀 모자라니 나중에 다 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거절하는 것이다. 늦게 내면서 다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거부하는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순간 “욱” 하는 혈기가 솟아 나왔다. 혈기의 속성은 손해인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돈 뭉치를 그 사무직원에게 얼굴에 확 뿌렸다. 온 사무실에 돈이 뿌려지고 날려 다녔다. 그 사무실을 뒤쳐 나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돈을 주워 다 세어서 정산했다고 한다.

속으로 “가난한 자를 울리면 벌 받지?”라고 중얼거리면서....

 

    허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창구의 아가씨가 나하고 태흥호를 같이 타고 나가 오징어를 잡다가 혼난 제주도 출신 신학 동기생의 아내가 되었다. 요즈음도 가끔 만나면 그 일 때문에 슬며시 웃는다. 바보 같은 나의 이미지가 혈기있고 성깔부리는 사람으로 알고 있으려나? 그래서 대인 관계에서 첫인상이 중요한 것이다. 나중에 전도사로 받은 사례금도 보태서 학기 말 쯤에나 일수 계돈 갚듯이 수업료를 마감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나는 분납이 가능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성깔도 때로 부릴만 하구먼....ㅋㅋㅋㅋ

 

    3학년 말쯤, 33살 가난한 신학생에게 중매 제의가 들어왔다. 달린 건 그거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부목사와 동기들의 중매 성화에 만나 기적같은 결혼이 이루어졌다. 개뿔도 없는데... 하기사 개가 뿔이 있을리 없지만..... 다음에 결혼이 이루어진 사연을 말하기로 하고...

  그 다음 해에 꿈에 그리던 결혼이 이루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그래도 미래를 보고 온다는 여자, 그것은 하늘의 점지였다. 물론 여자가 전세방을 얻어 주어서 기숙사를 탈출했다. 그 이후로 등록금도 해결됐다. 꿈인가 생시인가? 결혼 전후로 두 달 먹은 고기가 평생 먹은 고기보다 많았다면 과장이겠지? 우리는 생선통이니까.

 

    열심히 공부하여 그럭저럭 신학교도 4학년 마치고, 방송대도 5학년 마쳐갔다. 아내가 열심히 뒷받침하는 덕에 보답이라 하듯이... 밤낮없이 공부하는 것이 직업이 되었다. 신학교보다 행정학이 더 어려웠고 힘들었다. 어렵사리 서울대학에서의 출석수업과 방송대 졸업 시험에 합격하여 학사학위가 나오고 졸업이 인정되었다.

  나의 다음 목표는 신학대학원이었다. 대학원 시험을 쳤다. 본과 학생보다 좋은 점수로 대학원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런데 대학원 등록금이 한두 푼이 아니다. 대학원을 가지 않아도 당시에는 목사가되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공부에 한이 맺힌 나는 가고 싶었다. 현실은 돈이 없다는 것이다.

 

    대학원 합격을 한 날 아내는 어느 분위기 있는 다방에서 만나자고 한다. 나는 저녁을 같이 먹고 커피나 먹고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심 고민하는 나를 위로하고 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약속한 장소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다 먹고 이야기하다가 일어설 즈음에 무엇을 가방에서 슬그머니 건넨다. 보니 봉투이다. 나에게는 염치없는 봉투인 것이다. 결혼 이후 신학교 다니는 동안 다 아내 신세를 지고 공부를 마쳤는데도 나는 봉투를 준 일이 없다.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낼 등록금이라는 것이다. 이 때를 위해 모아둔 것이라고 한다. 모아 둘 만큼 준적도 없고 받기만 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여보 고마워 열심히 공부할게” 라는 말로 울먹였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먼저 내려 왔다. 커피 값도 당연 아내가 낼 줄 알고 내려왔다.

 

      졸업 전에 방송대학에서 우리가 처음 시작인 학사 1기생들의 대학원 합격 수기를 모집한다고 학보에 났다. 응모할 마음이 생겼다. 글도 글이지만 나의 공부는 눈물이 절반인 공부이기에 잘 쓰면 뭔가 될 것 같았다. 마감 날까지 열심히 썼다. 신혼인 아내는 책상에 앉아 뭔가 열심히 하는 남편이 대견스러운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저 글 좀 쓰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원 합격수기의 제목은 “오징어 인생”이었다.

  오징어를 잡으면서 공부하고, 공부가 한이 맺혀 거친 파도에서도 단어를 외우다 설음을 받고, 군 감옥에 들어가서 예수를 믿게 되어 새 삶을 얻게 된 경위, 신학교 공부를 하면서 방송대 공부를 위해 애쓴 노력, 강원대학교 출석수업 시 돈이 없어 울며 먹은 순대국 이야기, 오징어를 잡다가 북에 끌러갈 뻔한 이야기, 오징어는 앞뒤로 다니는 야행성 동물이라고, 그리고 아내의 대학원 등록금 마련에 눈물어린 이야기를 썼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원고분량에 내용전개의 박진감까지 더하고, 교정에 교정을 다하고 다듬어 제출했다.

 

    수천의 한 맺은 늦깍이 학생들이 독학으로 학사과정 5년을 공부하고 대학원 합격의 꿈을 이룬 작품들이 전국에서 응모되었다. 각자 자기의 기막힌 사연들이 쌓여진 글들의 모음이었다. 마감 후 대학원에서 공부하는데 학교로 전화가 왔다. 전영택이 대학원 합격수기 모집에 최우수작, 즉 1등을 했다는 것이다. 대학원으로 전화가 온 것은 실제 그 대학원에 합격했는가를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신학동기들이 더 난리였다.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한 턱 내라고 한다. 한 턱 밖에 없는 턱이지만 낼 수밖에... 좁은 방에서 형편에 맞게 턱을 내느라고 곤욕을 아내가 치뤘지만 즐거운 비명인 것이다.

 

    며칠 후 방송대학 신문이 집에 배달되었다. 그 신문은 최우수작과 당선작 여러 편이 지문에 소개되었고 심사과정을 평한 것도 나왔다. 지금도 그 감격을 품고 착각 속에 산다. 방송대 국어과 교수들과 심사위원이 만장일치로 내 수기를 뽑았다. 삶의 다큐, 논픽션 스토리와 문학적 전개과정을 높이 보고 최우수작으로 뽑았다고 한다. 정말 내가 잘 써서라기보다 나를 쓰게끔 한 역경을 준 하나님의 은혜였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시편 119:71)”

 

    방송대학에서 학장에게 상을 받았다. 상급으로 당시 30만원(85년도기준)을 받았다. 이 상급을 받는 순간 이기심이 발동했다. 아내에게 주어 아내가 쓰도록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그런데 그 당시에는 철이 덜 들었다. 누가 그러는데 남자가 철들면 죽는다고..... 당시는 철이 덜 드니까 죽을 날이 멀었는데 이제 조금 철이 드는 것 같으니 그 날이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아뭏튼 그 이기심, 그 상금 쓰임의 용도를 우리 엄마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다. 고생해서 키운 엄마, 돈도 벌어주지 못한 아들이 예수 그렇게 믿는다고 미친 소리 들은 엄마에게 쓰면, 뭔가 해 드리면 보상이 되지 않을까 해서... 그 때 엄마는 백내장이 심해서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다.

 

“ 여보! 내 상급으로 꼭 하고 싶은 일 하나 하고 싶은데....”

 

  그래서 엄마의 백내장 수술비로 쓰자고 했더니 아내는 쾌히 승낙한다. 요즈음은 더 적은 일도 승낙하지 않는데, 당시에는 사랑의 힘이 강해서였을까? 기적같은 승낙을 받았다.

 

  결국 그 상급은 엄마의 고생을 품은 것이기에 엄마의 눈을 고치는 비용으로 써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의 방법과 절차가 이기적이었다. 수술은 원주 기독병원에서 했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엄마에게서 생전 없던 전화가 왔다.

 

  “고맙다”

딱 한마디 그래서 내가 우쭐 거리는 마음으로 한마디 더했다.

 

“엄마! 이쯤 되면 목사질 잘하는 거 맞지....”

 “그래.... 이제 마누라에게 잘 해” ...

 

근데 언제 내가 마누라 보기에 철들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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