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대한민국만세

11,775 2014.06.2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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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편입하여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기숙사가 모자랐다. 아니 기숙사비가 저렴한 곳을 선택했다. 수유리 주택가에 학교에서 매입한 단독주택이 여러 채가 있었다. 거기서는 자취생활을 해야 한다. 먹을 것, 입을 것 다 자비량으로... 한 집에 10명씩, 방 한 칸에 3,4명씩 배정 받았다. 가난한 신학생들의 집합체이다. 복잡도 하지만 아침이 되면 난리다. 화장실, 세수, 또 밥은 ...  나는 바다에서 자취 경력이 있어 밥을 해먹는 데는 이력이 났다. 어떤 때는 여럿이 몰려와서 내가 한 밥을 나눠 먹는다. 숟가락 하나만 달랑 들고 와서... 말들은 잘하지 나눔 공동체라나?  거친 음식도 나누면 정.... 집에서 가져온 이면수로 국을 끓으니(원래는 구워 먹어야 하는데...)
 “이렇게도 해 먹어요?” 묻는다. “느네가 이면수 국 맛을 아느냐?”
아니 많은 인원이 적은 비용으로 먹으려면 군대 부식처럼 물을 넉넉히 넣고 끓이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산다고 했지. 열심히 두 학교를 공부했다. 신학교와 방송대학교 학사과정.... 다 하려면 늦은 만큼 잠을 줄여야 한다. 학교 도서실에서 제일 늦게 내려온다. 공부도 공부이지만, 전기세 아끼려고....
   
    그렇게 노력을 한 결과 72명의 학생 중에 최고의 성적을 받았다. 아니 나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엄마의 한, 내 자신의 설음과 한이 맺힌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 상급은 장학금으로 나오는 데 다음 학기가 면제라는 것이다. 매 학기 열심해야만 매번 면제 받는 것이다. 설음이 먹혀 들어갔다. 학교에서 공부해 보았지만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일등을 한번하면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결과에 나도 놀랬다. 나이 들었는데(32살) 녹이 쓸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바다에서 설음을 받아 가면서 외운 영어 단어들이 이렇게 효자 역할을 해 주었다는 것, 편입생들이 나이가 좀 있어 영어에 약한데 신학영어 원서 해석에는 꽤 덕을 보았다. 신학교 공부는 논술하는 것이 많은데 영어는 공식적으로 점수따는 터 밭이었다.
   
    그러나 매학기 마다 장학금을 받아 수업료는 되지만 기성회비와 기숙사비, 가을 내내 자취할 비용은 나가 벌어야 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방송대학 출석수업도 있어서 변변한 아르바이트도 구하지 못했다. 신학교가 6월, 11월 중순에 끝나면 방송대학 7월, 12월 출석수업과 기말고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학생들이 방학이라고 고향에 내려가면 빈 기숙사를 지키면서 한신대학 도서실에서 밤을 새웠다.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행정학 각 과목의 학점을 열심히 이수했다.

    그리고 7월말과 12월 말에는 내가 돈을 버는 가장 익숙한 방법이 바다에서 오징어를 잡는 일이다. 오징어가 아니면 수입이 없다. 후원자도 없다. 엄마도, 누나도... 몇 년을 봉사한 모 교회에서도.... 지금도 그 점이 섭섭하지만.....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 바다로 내 몰린다. 거기서도 밤을 새야 돈이 생긴다. 나는 밤을 새기 위해 운명 지어진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길들여졌다. 2학년 여름에는 오징어잡이, 겨울에는 복어잡이, 3학년 때에도....

    3학년 때 여름, 같은 신학생 중에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제주도 출신이 있었다. 내가 바다에 나가 오징어 잡으면 기숙사비와 용돈을 번다고 하니 자기도 동참하겠다고 했다. 배를 탄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좀 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이 오징어잡이 준비를 하고 나갔다. 다행히 배 탈 자리는 있었다. 우리 매형 배인 태흥호였다. 매형이 처남이 늦게 공부한다는데 직접 돈은 주어도 한 자리는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출석수업을 마치고 같이 출항을 했다. 3,4일을 공해상으로 속초에서 동북 방향으로 콩닥거리며 나갔다. 첫 날 정착한 곳에서 오징어를 괜찮게 잡았다. 나는 낮에는 방어도 잡았다. 낚시도 좋아하지만 이 놈은 얼렸다가 기숙사에서 반찬으로 쓰기 때문에 기를 쓰고 잡는다. 선장이나 선주는 오징어 잡는데 지장이 있다고 못하게 말리거나 좋아하지 않아 눈치를 주었다. 그래도 매형 배니까..... 다음 날은 더 멀리 나갔다. 더 많이 잡혔다. 이렇게 매일 고기를 따라 북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고기를 잡고... 제주도 출신 신학생도 별 어려움 없이 잘 잡고 있었다. 그렇게 10여 번 이상을 옮기며 북으로 가는 데 오징어 생산량이 점점 나아졌다. 신도 났다. 오징어가 곧 돈이기 때문이다.

    낮에 배 안에서 저녁에 고기를 잡기위해 잠을 자는 게 오징어 배의 특징이다. 오늘 따라 잠결에 엔진의 기계소리가 너무 요란했다.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발동기 엔진소리가 보통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요란하다. 전 속력으로 어딘가를 이동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왜 이래 무슨 난리가 났나? 무엇에 쫒기고 있는가?” 눈을 떴다. 시끄러운 엔진소리에 잠을 깬 사람도 여럿이 있었다. 
  누군가 배 밑창에서 자고 있는 문을 열고 뱃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큰일 났어요 다 일어나 배 갑판 위로 올라 오세요. 선장이 다 나오랍니다”    사람들은
“왜? 무슨 일이 있어요?”
 걱정스러운 태도로 묻는다. 배에서는 이쯤되면 위기이다. 바다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 모르기에.... 불안한 것이다. 그 사람은 또 소리 지른다.
“빨리요 빨리! 다 나와 손들고 있으랍니다.”

    더 불안한 것이다. 아니 손은 왜 들어 구명 쪼끼를 입으라면 몰라도 무슨 자다 홍두깨인가? 그래도 선장의 명이니 한 두 사람씩 갑판위로 나갔다. 총원 23명인데 20여명이 그 칸에서 잤다. 시간이 좀 걸렸다. 나도 중간에 나갔다. 그런데 배는 죽으라고, 아니 엔진이 다 부서지라고 콩닥거리면서 검은 연기를 내 뿜으면서 달린다.

    밖에 나간 나는 답답한 배 칸에서 나와서 맑은 공기를 마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배 뒤에 서 누군가 쫒아오는 배가 있었다.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경비정이었다. 하얀 물결만이 보이고 전속력으로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 때 직감했다. 북한 경비정이 우릴 잡으러 오는구나. 아무리 봐도 검은 회색 경비정이다. 먼저 나간 사람들은 차례차례 무릎을 꿇고 손들고 앉아 있었다. 다리가 후둘 거렸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많은 생각들.... 육군교도소에서 그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이제 나이 서른이 넘어 공부하려고 겨우 몸부림쳤는데.... 기숙사비용 감당하려고 바다에 왔는데 무슨 난리냐?
  “재수가 옴 붙었어, 되는 일이 없어....”

    또 소설 같은 일이 또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사람들이 나오는 배 칸으로 다시 들어갔다. 거의 다 빠져 나오는 틈으로 거슬러 들어갔다. 배 안에는 할아버지 한 분만이 앉아 있었다.
 “밖에 무슨 일이 있음매? ”
이북에서 실향민 할아버지이다.
“예, 북한 경비정이 쫒아오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어째, 요즈음 북쪽으로 갈수록 오징어가 잘 잡힌다고 자꾸 올라가더니만... 쯔쯔”
혀를 찬다. 나 같은 늙은이 잡아 가려면 잡으라는 식으로....

    내가 다시 배 밑으로 내려간 것은 바다에 오면서 짬을 내 책을 보려고 가져온 책 걱정 때문이었다. 행정학 교과서인 한국정부론, 조직론, 기획론... 그래도 하사관 학교에서 배운 정신이라 할까? 적에게 붙잡히면 관등성명과
군번 외에는 알리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보는 행정학 교과서가 적에게 들어가 좋을 리 없고, 공부하는 학생이면 훗날 교육 후 남파될 가능성을 배제하려고, 이 책을 없애려고 들어갔다. 가방에 450그람이 넘는 오징어잡이용 추를 넣고 다시 바다에 빠트리는 것이었다. 가방에 책을 부랴부랴 집어넣고 나오려다가 잠간 멈추었다. 명색이 내가 신학생인데.... 내가 이 배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싶었던 것이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응답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다. 지금이 환난이 아닌가? 한참을 기도했다. 간절했다. 그리고 추와 책과 함께 준비한 것을 바다에 빠트려 흔적을 없애려고 배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다. 배 앞 간판에 나간 사람들이 전부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목이 메도록 부르는 것이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어찌된 일인가? 아무리 들어도
“대한민국 만세”가 계속 들려왔다. 이 사람들이 실성했나? 내가 바다에 책을 먼저 던졌으면 또 책을 살 뻔했다. 진짜 맞았다. 우리 배 옆을 지나는 배는 우리나라 군함이었다. 대한민국 태극기를 휘날리는 우리 군함이었다. 눈물이 났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지 못했는데.... 이렇게 애국하고 싶은 마음이 생김이 어쩐 일인가? 그 때 만큼 태극기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정말 정말....
“대한민국 만세”이다. “만세, 만세”
월드컵에서 골 하나 집어넣은 것과 차원이 다른 만세이다.

  실은 이렇게 되었다. 우리 배나 여러 오징어배가 월선 조업은 아니고 공해상이지만 원산 아니면 그 위의 위치에서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우리 배와 마산호(속초항 소속)가 북한 경비정에게 쫒기면서 S.O.S를 쳤다. 이 다급한 무전을 듣고 우리 함정이 출동하여 공해상으로 구하려 왔다. 그러나 두 배를 다 구할 수 없었다. 방향을 안 쪽으로 튼 우리 배를 호위하였다. 마산호는 더 바다 쪽을 향하였다. 둘 중 하나인 마산호는 그 날 납북이 되었다. 선장이 손을 들라고 지시한 것은 혹 북한군이 우리 태도가 불량하면 총을 쏠까봐 미리 저자세를 취하려는 조치였던 것이다. 그 날 뒤에서 쫒아오면서 흰 물결이 보인 배는 북한 경비정이 맞았다. 두 배가 쫒기는 중 북한 경비정이 마산호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 함정이 오니까
한 척만을 끌고 간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마산호에 탄 사람들의 고통이 내가 당할 고통을 대신했다는 것에 미안할 따름이었다.

    해군에 항상 빚진 마음으로 산다. 훗날 해군 군목이된 아들의 초청으로 해군 신병을 배출하는 교육사교회에서 이 드라마틱한 사건을 간증하게 되었다. 진지하게 들었다. 피곤한데도 반응이 좋았다.
 “여러분이 감당할 바다에서 해군의 도움으로 나는 살아 났습니다. 우리 바다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복무 하십시요”라고.... 
 
    그 고난 중에 잡은 오징어를 팔아 3학년 2학기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교회에서 전도사직을 수행할 일자리가 들어와 오징어 잡으러 가지 않아도 기숙사비와 여려 용돈이 해결되었다.

  가끔 제주도 출신 그 목사님을 만날 때마다
    “형님, 태흥호! 오징어! 대한민국 만세....”
하면 지금도 둘 만이 아는 찡한 웃음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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