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눈물로 이룬 만학 - 한국신학대학

10,280 2014.01.1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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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많고 탈 많았던 군에서 제대 후 31살까지 교회에 미치다시피 봉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남이 알아주든 주지 않든지.... ‘81년도 말, 주변의 친구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데 나 자신은 초라하였다. 교회에서도 노총각으로 분류 되었다.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믿음이 식어서라기보다 섬기던 교회도 어느 정도 성장해서 일군들도 생겼다. 내가 아니라도 교회 일군이 생길 수 있겠다 싶었다.

    새로 오신 뚝배기 같은 목사님도 젊은 날, 교회에 미쳐 자기 앞길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무언의 압력도 있었다. 그래서 새로 만든 대포의 반석교회를 맡겼다. 그 해 겨울 성경학교까지 열심히 봉사하고 나도 내 앞길을 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반석교회에도 서울 공덕교회에서 온 한성효 장로가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생선 장사하는 늙은 엄마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너무 내 신앙적 고집만 부린 것 같았다. 이제는 공부할 기회는 주어지면 다행이지만 현실적으로 바다에 나가서 고기 잡고 돈을 벌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뱃놈도 좋다는 색시가 있으면 장가도 가고....

    82년 초부터 오징어 도구를 챙기고 외삼촌 배인 남풍호를 다시 탔다. 겨울 오징어 배를 나간 것이다. 묵호항을 드나들며 오징어를 잡아 거기에서 팔았다. 또 점점 오징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겨울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며 오징어 잡고 밥을 해먹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룡포 항 앞에서 출항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날 2, 3일씩 바다에 나가 오징어를 잡았다. 겨울 파도는 배 간판을 온통 하얀 얼음으로 뒤 덮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배가 기관 고장이 난 것이다. 파도가 기관실을 덮친 것이다. 성난 겨울 파도는 약점을 알았듯이 사정없이 쳤다. 물풍 하나만을 의지하던 배는 겨울바람과 큰 파도 앞에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었다. 파도가 배 위를 덮칠 때마다 목숨이 간들 거렸다. 이튼 날도 그 다음 날도.... 기관장은 기계와 밤새 씨름을 했지만 고개만 흔든다. 바다에서 잔 뼈가 굵은 외삼촌도 낙망의 얼굴이다. 무선도 통하지 않았다. 구조할 배도 없었다. 망망 대해 일본 쪽으로 한없이 떠 내려 가는 것이다. 선원 23명이 다 사색이 되었다. 어릴 때 생각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청호동 앞 방파제에 큰 파도가 덮치면서 고깃배가 산산히 부서지면서 살려 달라고 외치며 죽어가던 어부들... 우리도 그렇게 안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언젠가는 육지까지 밀려가면 그렇게 될 것이다. 뱃놈의 최후를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세 타령을 했다. 푸념이 터졌다.

  ‘난 참 재수 없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다. 새 마음 먹고 나와 살자고 결심 하고 나왔는    데  이렇게 표류 신세라니...’

  그래도 죽는다는 것에는 덤덤했다. 세상에는 피지 못하고 지는 꽃도 수두룩한데, 나 같은 민초 하나 죽은 들 세상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

한편 생각하니 이 파도와 표류는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성경의 요나와 같았다. 다시스로 가서 니느웨 사람을 구원해야 하는데 가기 싫어 다른 길로 가서 풍랑을 만나고 던져짐을 받은 자가 요나이다. 고래 배속에서 회개하고 구원 받아 다시 사명을 감당한 자 같이.... 점점 날짜가 지나니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파도도 더 치고, 배는 미친 듯이 흔들리고, 밥도 며칠 굶고.... 그래서 은근히 배 밑창에서 다급한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나 살려 주시면 이번에 육지에 가서 목회의 길을 갈께요....’

  목회의 길과 목숨을 거래하였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 목회의 길을 걸으라는 권면도 있었고, 어느 날 부흥회 가서 손 든 적도 있었다. 현실은 자격도 없고, 목회자는 배고프고, 남에게 시달리고, 매여 눈치보고 살고, 더 나가서는 돈도 못 벌고.... 그게 싫어 입 밖에도 아니 꿈에도 그 생각은 애써 지우려고 했다. 그런데 죽게 되니까 입에서 고백이 나온 것이다. 살려주시면 목회자가 되겠노라고.....

    낮에 배 밑창에서 한 참 기도하고 다시 선장실로 나가 상황을 살폈다. 선장인 외삼촌은 파도에 휩쓸리니까 얼쩡거리지 말라고 호된 고함을 친다. 멀리 독도가 아닌 섬 하나가 아주 멀리 보인다. 일본의 오끼 섬인 것 같았다. 그리고 궁굼해서 30분 후에 또 나왔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기도의 응답이 온 것이다. 멀리 수평선에 배 한 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일본 어선도, 순시선은 아니고.... 우리 한국 오징어잡이 어선이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우리를 찾아 3일을 헤메다가 겨우 찾은 것이다. 그리고 배를 앞에서 끌고 가는 데 말이 아니다. 파도치는 날, 끄는 배나 끌러가는 배나 둘 다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흔들리며 3일 만에 구룡포 항에 닿았다. 배 밑에서 생각했다.

  ‘괜히 기도했네.... 살려주시면 목회자가 되겠다는 기도를 30분만 늦게 했 어도 됐을 텐    데...’

  뒷간 갈 때와 올 때가 그렇게 다른 것처럼... 사람의 간사함이 내 마음에도 있었다.
 집에 와서 짐을 풀고 생각했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 해야 하는데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제 공부해서 언제 목사가 되며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하며... 또 어디로 가야할 곳을 알아 본 데도 없었다. 이제 마음잡고 돈 버는가 싶었는데 달라진 아들에 대한 엄마의 실망은 어떻구.......

    그때 마침 승범이가 억지로 집어 넣어 공부하게 된 한국방송대학 행정학과를 2년을 어렵사리 마쳤다. 나이도 있는데 1년이라도 빠르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방법은 편입이었다. 그 때 한신대 2년생 편입의 길이 생겼다. 공문이 교회로 왔다. 80년도에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많은 학생들이 결원이 되었다. 방송통신대학 2년 전문직 과정을 졸업한 자격으로 편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험을 쳤다. 그래도 틈틈이 공부한 영어 실력과 성경공부가 합격의 요인이 되었다. 합격을 하였지만 등록금이 걱정이었다. 교회에 사정해서 달라고 할 위인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수년간 엄마 신세지던 내가 이 나이에 대학 간다고 등록금을 달라고는 더욱 하기 어려웠다.

  ‘그래, 내가 의지 없어 가지 못한 게 아니라 돈 없어 못 가는 걸 어떻게 해....’

핑계거리나 구실이 생겼다. 내심 가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당시 교회 김도영 장로님이 알았다.

  ‘전 선생, 돈 걱정 말고 신학대학에 등록해! 남들은 붙지 못하는데 기왕 붙었으니 가야지....’

  어찌나 의외였는지 몰랐다. 장로님은 봉투를 내밀면서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야 다 전 선생 것이니 부담 없이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다녀’ 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돈은 내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다른 직업도 없이 전적으로 교회 일만하고 있으니 교회가 매달 4만원씩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찰 사례비? 활동비? 어떤 명목인지 몰라도 교회에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내가 이 돈 받으려고 교회에 와서 봉사한 것이 아니라는 고집으로 다 바쳤다. 일종의 교만이지.... 또 그랬다. 받은 다음 주에는 교회 헌금 통에 다시 몽땅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몇 년간을 내 마음과 삿바 싸움을 했다. 재정 집사인 김 장로님이 2만원은 헌금으로 다시 받고, 그 절반인 2만원씩을 나 몰래 몇 년간 적금을 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록금이 필요한 그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누구 것이 아니고 전 선생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하나님이 에수 믿지 않는 나를 구원하시려고 교도소에 보내어 고생시키고, 경험없는 나를 6-7년간 교회생활에서 실습시키고, 훗날 바다에서 죽게 될 즈음에 신학을 하도록 항복받고, 그 등록금까지 이렇게 예비했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죽을 고비를 체험해서 신학을 한다지만 엄마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큰누나 작은 누나, 여동생까지 시집가고 형은 외지로 직장 따라 가족과 함께 가고.... 나와 둘만 사는 엄마에게 고백할 시간이 왔다. 2월 등록이 마감될 즈음에 이실직고했다.

  “엄마 나 학교에 갑니다. 목사되는 학교에...”

  엄마는 기가 막혔다. 올 해부터는 맘 잡고 배를 타고 돈을 좀 벌어 오는가 싶더니 또 청천 벽력같은 소리로 학교에 간다는 것이다. 32살의 나이에 67살 노모를 두고 대학에 가다니...

“니.. 언제 내말 들었니? 남편 복 없는 년이 자식 복인들 있겠니?”
“평생 게기(고기)나 팔다 죽을 년이지....”

  신세타령까지 한다. 며칠 고민했고 흔들렸다. 그러나 떠날 그날이 왔다. 엄마에게 아침에 이제 학교로 가겠다고 했다. 교회에 아들을 빼앗겨 감정이 많은 엄마에게

  “교회에서 등록금을 다 해주었어요. 그리고 오늘 떠나면 여름 방학 때나 올 것입니다.”

  교회를 덜 욕보게 하려고 교회를 강조했다. 학교에서 먹고 자거나 하는 문제는 말도 못 부쳤다. 노모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기 싫었고 할 염치가 없었다.

  조양동 고속버스에 탔다. 떠날 시간이 다 될 즈음에 엄마가 고속버스 터미널에 온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입학 때나 졸업식, 학예회, 운동회.... 통 털어 한 번도 오지 않던 엄마가! 아니 교도소 면회 때에 한번은 왔었지? 늦게 학교에 간다니 기뻐서 오신 것일까? 착각은 자유! 운전자에게 말을 하고 잠간 버스에서 내려갔다. 엄마의 투박해진 손을 잡고

  “잘 있어요”

인사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손을 잡아 채면서

‘못 간다 이 간나 새끼야.... 이 나이 되도록 한 푼도 안 벌고 교회 미쳐 일만 하다가 이제 학교 간다니 말이 되느냐? ...’ 정말 말이 안되지....

  얼마나 손아구가 센지 겨우 뿌리쳤다. 하기사 한 평생 험한 일 만 했으니 힘이 셀 수밖에.... 그 손아귀로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켰다.

  “엄마 미안해요.... 서울로 공부하려 갔다 올께요”

하면서 버스에 올라 탔다.

  그런데 버스가 가지 않는다. 창밖을 내다본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가 버스 가는 길에 드러 누운 것이다. 사람들이 말린다. 겨우 일으켜 세우고.... 실랭이치고 몸부림치는 엄마를 보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흐느꼈다.

  미친 놈, 또 엄마 떨치고 미친 짓하면서 그 나이에 서울로 공부한다고 올라갔다. 그 엄마의 눈물을 보았기에..... 공부도 미친 듯이 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도 그 해부터 5년제 학사제도가 생겼다. 마치 날 위해 제도가 마련된 것처럼..... 행정학과 3학년에도 편입을 하였다. 기왕 공부하는 것, 밀린 공부, 원(願)없이 다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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