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목사질 잘하니?

3,221 2013.01.1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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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6월 15일, 34개월 15일 만에 드디어 예비군 복을 입었다. 그 파란 많은 군 생활은 잃은 것도 있었지만 얻은 것은 더 많았다. 아니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다. 내 삶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닷가... 무당 푸닥거리하는 동네에서 한 사람의 삶과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군 교도소에서 나온 후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한 것과 반드시 대학에 간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 특히 대학에 간다는 목표는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자력으로 간다는 장기 목표를 세웠다.

    제대하고 집에 오니 바다에는 꽁치 오징어가 많이 잡혔다. 며칠 쉬지 않고 바로 오징어 배를 탔다. 밤잠 자지 않고 열심히 잡았다. 끝도 없는 망망대해와 수많은 별들을 보며 밤을 세웠다.
    먹물로 얼룩진 얼굴, 밤새 젖은 옷, 피곤한 육체, 미친 듯이 흔들리는 배, 그리고 발동기 소음, 불편한 잠자리... 그래도 행복했다. 젊음이 있지 않은가? 미래가 있지 않은가? 엄마가 밤새 잡은 고기를 보고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행복했다. 돈을 만질 것을 생각하니 행복했다. 어떤 여건도 교도소 보다 낫다. 이게 내가 군에서 얻은 소득이다. 행복이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요, 가시적이 아니라 무형의 것임을....

    배를 타면서도 틈이 생기는 대로 교회에 나갔다.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전도사님에게 제일 좋은 오징어를 골라 횟감으로 드렸다. 6개월간 열심히 배를 탔다. 울릉도를 기점으로 10여 차례 들락거리며 오징어를 잡고 팔았다. 둘째 외삼촌의 배에서 남보다 20마리당 3마리의 배 삯을 감하는 사무장직을 맡아가면서.... 우리 땅 독도도 그 때 오징어를 잡으면서 보았다. 남들은 돈 주고  간 독도를 나는 삶의 현장에서 보았다. 오징어 배를 타니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이 불규칙했다. 뱃사람에게는 날이 좋으면 바다에 나가고 날이 험하면 쉬는 날이다.

    어느 날 모처럼 일요일에 배가 울릉도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파도가 너무 심하여 배를 항구 안에 접안하지 않고 항구 한 가운데 띄워 놓아 육지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몇 주만에 육지로 왔기에 교회를 가고 싶었다. 속에서 교회 가고자 하는 열정이 솟아 났다. 바다가 막혀도 막을 수 없었다. 청호동 사람들이 나룻배가 끊기면 하는 방식.... 머리에 옷을 동여매고 육지로 헤엄치는 가는 것이다. 나도 그 방법을 사용하여 헤엄쳐 육지까지 닿았다. 당시는 추석을 전후한 가을이니까 가능했다. 몸을 추스르고 교회에 닿으니 부흥강사가 열변을 토하며 설교한다. 바닷길이 험하여 일주일 약속하고 왔는데 육지로 못 갔다고 한다. 담임목사 대신 육지에서 온 강사가 그 날 설교를 하는 것이다. 다른 날 보다 은혜가 되었다.  헤엄쳐 교회에 왔으니까.... 그 날 설교가 잊어지지 않는 것도 지금까지 기적이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라.....첫째도 주님, 둘째도 주님, 세째도 주님....”
 
    년말 쯤 다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공부해서 예비고사에 합격하여야 대학에 간다. 하지만 공부할 장소가 없었다. 좁은 집에는 매일 엄마와 장사하는 아줌마들이 방을 차지하고 밤낮없이 떠들어대고, 잠자고 먹어대니 어딜 봐도 차분히 공부할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친구인 병택이네 집으로 갔다. 그 친구도 미술대학에 가는 것이 한이지만 가정형편상 그러지 못하고 집에서만 그림을 그렸다. 밤새 남의 집 전기 쓰는 것도 눈치 보였다. 그러나 세운 목표가 너무 강해 계속 빈대 붙기로 했다. 하루 3,4시간 자면서 그 동안 못했던 공부를 열심히 했다. 몇 개월이 지나고 나니 빈대도 양심이 있지 눈치가 보였다. 친구 여동생, 속자의 불평이 말이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던 중에 얼른 생각에 떠오르는 것이 교회였다.

    새로 지었지만 사람도 별로 모이지 않았다. 조양동의 성암교회. 넓은 방이 있음즉 하였다. 즉시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전도사님을 찾아갔다. 거래를 하였다. 구실은 내가 이 교회 새벽종을 제 시간에 꼬박꼬박 처 줄테니 방 하나만 빌려 달라는 조건이었다. 전도사님은 쾌히 승낙하였다. 공부할 책들을 2평도 안되는 앰프 실에 놓았다. 조그만 밥상이 책상이었다. 밤새 전기를 마음대로 써도 되었다. 약속대로 새벽이면 3시반에 초종, 4시에 재종을 정확하게 쳤다. 새벽예배가 마치면 미안한 마음으로 교회 청소를 했다. 그래야 방세와 전기세가 될 것 같아서....

    나를 이끄는 미지의 힘은 또 다시 나의 행로를 바꾸는 것이었다. 내가 나의 의지로 공부한다고 교회로 들어갔지만 위에 계신 분의 계획을 어찌 알리요... 4월에 교회로 들어가 3개월간 밤잠을 자기 않고 공부하고 아침에는 청소하고 주일 날에는 교회 아이들을 가르쳤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밖을 보았다. 봄에 심은 꽃들이 피고 여름 보리가 익어 누렇게 되었다. 어느 틈이라고 할 사이도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이 시간 속에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왜 사는가? 왜 공부해야하는가?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옳은가?

    심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날이 더워지니 별 생각이 다 든다고 자책하기도하고.... 나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의 체험이 일어났다. 극히 주관적이지만....  더워서 런링셔츠를 입으면서 내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교도소에서 가슴팍을 너무 맞아서 가슴에 얼룩얼룩 시퍼런 멍이 든 채로 있었다. 그렇다고 변변한 보약 한번 먹지 못했다. 먹을 염치도 돈도 없었다. 내 갈비뼈 속은 교도소 흔적이 남았다. 속으로 나는 40살만 살아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7월 11일 아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지상에서 천상의 기쁨을 맛보았다.  온 가슴이 타는 듯이 불이 내려왔다. 그리고 손을 만지는 곳마다 몸이 낫는 것이다. 퍼런 멍이 없어지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체험이라는 것인가?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내 퍼런 멍자국이 없어지면서 만지는 부분마다 낫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기뻤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현실에서 하늘의 일부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믿음이 없는 나를 믿게 하는 가시적인 현상이었다.     
    너무나 황홀한 이 체험은 나를 더욱 교회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새벽종부터 저녁까지 교회를 지키며, 돌보며 청소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낮에는 꽃밭 손질과 교회 주변 허드렛일을... 공부는 뒷전이었다. 아니 포기했다. 한방의 은혜로 그렇게 쉽게 목표가 무너져 내렸다. 삶의 가치와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주일날이 되었다. 전도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체험한 간증을 하겠다고 했다. 허락받고 간증을 하는데 은혜가 쏟아져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권사님 한분이 나와서
  “전 선생 절제하시오. 절제도 은사 중 하나입니다.”
그 말은 그만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자꾸 말이 나왔다. 반 강제로 이끌리다시피 기도실에 눕혀졌다. 거의 기절상태인지 입신인지 의식이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너무 교회 일을  혼자 하다가 지쳤는가 봐 .... 아니야 제대로 먹지 못해 기가 떨어졌는가봐... ” 전도사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가 들리고는 필름이 끊어졌다.

    한참을 잤다고 생각하고 깨어보니 캄캄한 밤이었다. 교회가 아니라 집이었다. 몸에는 무언가 묶여 있었다. 밧줄이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몰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집에 알려서 누나와 친척들이 달려 왔다. 그리고 수면제 먹여서 재우고 묶어 놓은 것이다. 이유인즉 교회에서 너무 공부와 교회 일에 심취하여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집에 통고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 새벽에 용을 쓰고 밧줄을 풀고 교회로 갔다. 새벽종을 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묶어놔도 도망가고 설득도 애원도 다 필요 없었다.
    집에서도 말리지 못하는 고집불통이 되었다. 우리 외삼촌은 엄마에게 “영택이가 군에서 너무 맞아 또랑이가 되었는가봐”
누나는
“애가 너무 공부한다고 애쓰고 힘쓰다 맛이 살짝 갔다”고 했다. 주변에서 별의 별 이야기를 다 들었다.
고모부는
“야 너처럼 예수 믿어야 천당 간다면 갈 사람 하나도 없겠다”고 빈정된다. 그러나 말거나 나는 결심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는데 남이 알아주면 어떻고 모르면 어떠냐고....  계속 교회에 가서 새벽종을 치고 청소하고 꽃밭 가꾸고 자격도 면허도 없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금도 그 때를 회고하면 내 평생 젊은 시절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가장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보면 어리석다고 하는 짓을 7년간이나 했다. 32살까지.... 혼자 살면서 평생 고생한 엄마를 돕지 않고 기대치에 어긋나게 사는 아들.....지금 생각하면 당시 엄마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원망스러웠을까?  예수가 누구이기에 아들을 저렇게 빼앗아 가는가? 오징어를 잡아 돈을 벌지도 않고, 자기 앞길을 위해 하던 공부도 포기하고, 장가갈 생각은 더욱 더 포기하고.... 매일 교회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아들을 생선 장사해서 밥을 먹여 주면서 까지.... 얼마나 미웠을까?  꺼꾸러 지금 내 아들이 그렇게 한다면 나는 우리 엄마 많큼 용서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 일을 한다고 그렇게 미쳐 다니면 용서가 안됐을 꺼야.... 그래서 나는 나를 용서하고 받아준 그 엄마를 지금도 못 잊고 있다.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고이는 것은 잘 참고 기다려준 엄마의 사랑이 고마워서이겠지..... 

    훗날 늦게 결혼하고 목사가 되어 작은 시골교회에서 일했다. 엄마에게 보란 듯이 전화를 한다. 왜냐하면 내가 교회에서 봉사할 때 엄마는 “교회 나가면 돈 주냐 밥 주냐 떡 주냐”라는 소리가 못이 박히도록 했기 때문에 목사해서 밥 먹고 사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엄마! 밥 잘 먹고 있어요. 애들도 잘 크고요....”
  “그래 밥 잘 먹고 살면 됐다. 요즈음 목사질 잘하니?”
  “엄마, 목사질이 뭐요? 무식하게?”
  “야, 싸움 잘하면 싸움질이라고 하고, 목수 잘하면 목수질이라고 하고, 노름 잘 놀면 노름질이라고 하는데 목사 잘하고 있으면 목사질이라고 하는데 뭐가 틀렸니?”
  기가 막혔다. 곰곰이 생각했다. 아니 엄마 말이 맞다. 무식한 것은 나다. 나는 지금 목사질을 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양을 사랑하고 교인들을 부지런히 살피고 예수를 부지런히 전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양심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우리 엄마가 말하는 목사질을 잘하는 것이 아니지.... 질이 무언가? 자기 방면에 길(道)이 나는 것이 아니가?

 바다에서 나를 부르신 예수님의 일을 길이 나도록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게  맞아... 목사질을 잘해야 세상에서 목사가 욕먹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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