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뭍으로 오른 오징어-탈바꿈을 위한 몸부림

13,599 2011.11.29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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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에 오른 오징어는 건조한 후 안주로, 일할 때 질겅질겅 씹는 간식거리로, 결혼을 위한 함이 오갈 때의 마스크 대용이나 폐백용 장식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쓰임을 받는다. 생 것은 회로, 삶아 먹기도 하고, 볶음요리의 단골메뉴가 되기도 한다.

살아 거꾸로도 주행하는 오징어를 보아온 아바이 마을 출신의 한 삶을 적어 본다. 어디든지 탈바꿈이란 쉽지 않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되기 위한 몸부림은 처절하다. 그래서 애처럽게 보여서 도와주면 그 나방이는 불구가 된다. 날지 못한다. 가혹하리 많큼 냉정해야 한다. 사회라는 구조는 행운으로 이루어진 결집체가 아니다. 오랜 세월 속에 부분의 아픔과 시행착오가 굳어지고 정형화되어지면서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본다.

아바이 마을에서의 탈출 또한 그럴 것이다. 체념 속에 현실에 안주하다 보면 배타는 일과 바닷가 일로 가난의 체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 늙어서도 어려운 자들의 집을 짓는 봉사를 그치지 않는 미국의 전(前) 대통령 지미 카터가 “사람이 꿈을 잃을 때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했다. 20대에 나는 아직 젊었다. 오징어 배타는 것으로 일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닷가에서 가난을 벗고 뱃놈을 벗어나려면 공부 밖에 없었다.

그래도 현실은 배로 내 몰았다. 가을 폭풍에 죽을 뻔한 체험을 하고서도 그해 겨울, 복어를 잡기 위해 소위 “남바로”라기도 하는 원양어업을 나갔다. 또 같은 남풍호를 타고.... 경북 죽변항에서 시작해서 고기 떼를 쫒아 후포항, 축산항, 강구항을 거쳐 내려갔다. 영하의 추위와 밤이면 눈이 부실 정도의 집어등과 졸음과 싸워야 했다. 복어 잡이는 미끼가 될 오징어를 국수 올처럼 가늘게 썰어서 낚시에 여러 개를 낀다. 낚시는 복어의 입이 닙빠처럼 강하기에 무엇이든지 물면 끊어진다. 낚시가 잘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강철 철사로 묶어야 한다. 미끼를 낀 후 수심 70-80미터에 무거운 춧돌과 함께 내린다. 바닥에서 약 1미터를 떼고 밤새 고패질(흔들면서 고기를 유인하는 행위)을 한다. 그러다가 뭔가 물린 듯한 감각이 오면 잡아채고 올린다. 잡힌 복어는 이리저리 몸부림치고 올라온다. 입에서 낚시를 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잘못하면 손가락이 잘리니까.....

잡힌 복어는 미끌한 액과 함께 온 배의 간판을 올챙이 흔들듯이 흔들면서 밤새 “뽁뽁” 거리며 다닌다. 다른 고기 보다 숨통이 질겨 잡아 놓아도 반나절은 산다. 죽은 줄 알고 손가락을 잘못 넣으면 작두질 하는 것처럼 잘린다.
당시 평균 크기의 복어 한 마리는 300-400원이었다. 밤새 40-50마리는 잡힌다. 아침이 되면 배삯을 제하고도 돈이 꽤 된다. 과외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낫고 명태 낚시일로 삯일 하는 것보다 더욱 나았다. 잡은 고기를 어협 판장에서 팔 때면 얼음과 복어의 미끈액이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몸을 몇 번이고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겨울 내내 복어를 잡으러 다니면서 추운 간판 위에서 쪼그리고 끼니를 곤로를 피워서 밥을 해먹는 일은 정말 싫었다. 학교를 졸업해서 처음 집을 떠난 돈벌이라 집도 그리웠다. 때로 손이 시러워 눈물이 나고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 눈물도 났다. 얼음과 함께 먹는 밥은 더욱 이 환경을 벗어나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마음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번 겨울이 끝나면 어떻게 해서라도 배타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면 더 나은 생활이 있겠지” 라는 꿈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겨울 복어잡이의 고생이 자극이 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단칸방인 우리 집에는 공부방이 없었다. 저녁에는 엄마와 같이 장사하는 아줌마들의 하루 임금 배분 문제를 놓고 떠드는 소리에는 더욱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 집에 놀러 간다면서 가서는 몰래 공부를 시작했다. 밤에 전기 쓰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 끼니도.... 이러면 엄마와의 약속을 깨는 것이다. 공부하면서도 공부하지 않는 척.... 그래도 목표를 정했다. 1년 반이 있으면 군대를 가는데 군에 가기 전에 단 한번 만에 대학을 합격해야한다. 고려사항이 많았다. 가난하니 국비로 가야하고, 배를 좋아하니 배를 타야하고, 통통배 보다는 배포 크게 상선 선장을.... 꿈도 야무졌다. 군을 면제받고도 나와서 직업과 연결되는 대학.... 돈도 많이 번다는 조건을 충족하는 대학은 한국해양대학 뿐이었다. 그곳에 합격하려면 실력이 만만치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해보자. 떨어지면 부수러기라도 남지 않겠느냐는 각오로 밤을 새워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오징어나 복어 잡이도 밤을 새는데.... 그 정신이라면....

여름에 오징어가 많이 날 때는 며칠씩 나가서 돈벌이도 했다. 그래도 목표는 일단 예비고사(수능)를 합격하는 것이다. 틈틈이 공부하고 여름이 끝나자 또 밤을 새워 공부를 했다. 졸업 후 2년 만에 처음 시험을 보았다. 예비고사 치는 날도 돈이 없어 강릉에 사는 옛날 고등학교 짝꿍 집에서 잠을 자고 시험을 쳤다. 결과를 초조히 기다렸다. 당시 예비고사는 현역이든 재수, 삼수든 전체 수험생의 반을 추려 대학에 응시하는 제도였다. 달리 말하면 당시 예비고사 합격은 전국 고등학생의 절반 수준의 성적이 되는 것이다. 밤잠 자지 못하고 친구와 가족의 눈치를 보고 도둑 공부를 했는데 결과가 정말 기다려졌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1971년 12월 23일 목요일 오후의 라디오 소리 “4175번!” 합격이었다. 날아갈 듯 기뻤다. 눈물이 평펑 터져나왔다. 이렇게 좋을 수가.....

그러나 한 달도 남지 않은 본고사를 위해 출제경향을 살피고 한국해양대학의 여러 조건에 맞추어야 들어간다. 시험에 응시하기 전제조건으로, 신체검사에 합격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서 키가 162센티 이상, 몸무게 54킬로 이상, 시력 1.0이상, 그밖에 신체에 다른 이상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척박하게 자란 몸이라 신체조건은 합격이었다. 학교 때 제대로 먹지 못해 앞줄 신세를 면치 못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오징어를 잡는 중에 늦게 10센티 이상이 자라서 169센티, 몸무게 60킬로, 명태 눈알 뽑아 먹은 시력은 2.0...

그런데 문제는 항상 훌쩍거리는 코가 문제였다. 엄마에게는 코가 아프다고 떼를 써 돈을 구해 시내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악성 비후증이라는 것이다. 의사의 말이 콧구멍의 안쪽 살이 부풀어 코를 막고 있어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으니 양쪽 다 수술을 하라는 것이다. 참으로 암담했다. 수술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목표가 정해지니 수단이 정당화 될 수 밖에....

돈이 없으니 편법을 썼다. 소위 야메(무면허)로 하는 곳이 있다는 곳을 알았다. 값은 정식 병원의 오분의 일 값도 안되었다. 한 코구멍에 3,000원, 그래서 2개를 다 수술하면 6,000원이었다. 엄마에게는 대학 간다는 것 자체가 씨알도 먹히지 않아 돈을 타낼 엄두도 못 냈다. 시집간 큰누나에게 사정해서 돈을 타냈다. 수술을 시작했다. 음산한 수술실이 마치 은밀한 도살장 같았다. 수술 칼과 주사기, 희안하게 구부러진 가위, 그리고 피 나면 닦을 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면허 의사가 들어 왔다. 마취를 하면 6,000원을 더 내야한다고 했다.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나는 돈이 없으니 그냥 해달라고 했다. 의사는 “괭장히 아플 텐데....” 하면서 수술을 시작했다. 간호하는 보조원에게 나를 꽁꽁 묶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구부러진 가위를 코 속 깊이 집어 넣었다. 나는 코 속이 그렇게 깊은 줄 그 때에서야 알았다. 가위 하나가 전부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코 속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더니 의사가 “자.... 참아요” 하면서 무언가를 선뜩 잘라 내었다. 온 신경이 다 딸려 가더니 번개치는 듯한 아픔과 동시에 코 속에서 무언가 잘려 나갔다. 하기사 마취를 안했으니 오죽했으랴.... “가난은 언제나 대가를 치르면서 사는구나.” 생각했다.

마루에는 코피로 유혈이 낭자했고 몸은 잔치 날 돼지 잡은 것처럼 범벅이었다. 잘라낸 살은 손톱만한데 피는 성질을 못 이기며 계속 나오고 있었다. 코는 불어서 눈이 안보일 정도가 되었다. 피에로의 코 같았다. 야메 의사는 다음 날 와서 한쪽 코를 더 수술하자는 것이다. 모르고 한번이지 두 번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다음 날이 수술인데 아픔의 악몽이 떠올라서 문 밖에 서성거리다가 용기가 나지 않아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며칠 남지 않는 신체검사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알고 당하는 고통을 두배로 하고 수술을 마쳤다.

드디어 1월 중순 한국해양대학 시험을 치기 위해 속초 밖을 벗어나지 못한 촌놈이 금의환향을 위해 부산으로 갔다. 누나에게 겨우 시험 칠 최소한의 비용을 마련해서....잘 되어 이다음 벌어서 갚아 준다는 조건으로....

번쩍 거리는 부산항. 꿈의 상선들. 오가는 차들. 영도를 지나 물어 물어 동삼동에 있는 해양대학에 갔다. 써온 지원서를 내고 개고생해서 수술을 한 덕에 신체검사는 합격했다. 안되었으면 그 억울함이 어땠을까? 대학 근처에서 여관을 빌리려 했다. 하나 전국에서 몰려온 학생들로 빈 집이 없었다. 아니 먼저와 다 선점했다. 다음 날 시험칠 놈이 방을 구하려고 금쪽같은 하루를 거의다 소비했다. 그런데 정말 방이 없었다. 할 수가 없어 좀 떨어진 곳 싸구려 여인숙에 자리를 구했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시험치는 날 온 몸에 마비가 왔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부산에 지진이 난 것처럼 헤메였다. 그 시퍼런 태풍이 오는
바다에서도 멀미를 하지 않았는데 배를 탄 것처럼 멀미가 났다. 땅이 가라 앉았다가 솟는다. 지금도 어떻게 학교로 가서 어떻게 시험을 치렸는지 몰랐다. 이유는 밤새 싸구려 여인숙에서 연탄 냄새를 맡은 것이다. 재수가 옴이붙었는지 어떻게 하필 연탄 냄새나는 집을 택하였는가? 지질이도 운도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경쟁률이 높은 시험인데 거기다가 빙빙도는 머리, 지어 짜는 듯한 압박감..... 결과는 뻔했다. 나중에 여인숙에 와서 시험지를 가지고 답안을 맞추어 보고는 통곡을 했다. 그렇게 원하던 학교에 불합격을 한 것이다. 부산의 모든 불빛이 겨울 성탄 츄리처럼 눈물에 달렸다. 이유야 어쨌든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긴 좌절을 안고 뭍으로 간 오징어는 제 자리로 돌아왔다.

엄마가 뭍으로 돌아온 오징어에게 하는 말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니까....”
나는 “그래 뱃놈은 짠물을 먹고 살아야 하는가봐....” 중얼 거렸다.

그 바람에 군에 가기 전까지 꺼꾸러가는 오징어가 내 손에 많이 죽었다.


댓글목록

김미자14님의 댓글

정말 마음고생이 심하셨었네요..울 친정오빠 얘기같아 마음이 아려옵니다.<BR>울 친정오빠도  부모님 몰래 3사관학교 시험 봤는데  다행히 합격되어 오빠뜻대로 속초를  벗어날 수 있었답니다...늘  그 시절의 고향생각을 잊지않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오래오래 소중한 추억의 선배님글 읽어볼 수 있도록,건강하세요....(꾸벅)

정성수12님의 댓글

형님의 좋은글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BR>저도 오징어배(은광호)를 타고 어청도, 적열비열도쪽으로 오징어를 잡으간 기억이 .. 참 어려웠던 시절 ..<BR>글을 읽다보면 옛생각이 많이 나네요 .. 계속 좋은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