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끌리고 밀려다닌 학교

9,651 2008.04.1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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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4월 13일

청호동은 아직 6.25 전흔이 가시지 않은 곳이다. 백사장에는 듬성 듬성 대포를 맞아 뒤집어진 군용차량과 임시로 묻은 군인들의 무덤이 흉물스럽게 군데 군데 있었다. 백사장을 밀어서 임시로 마련된 운동장에 대형 군용텐트와 송판으로 덜 지은 초등학교가 시작되었다. 청호초등학교... 우리 1학년은 남녀 각 1반씩으로 시작되었다. 2학년, 4학년은 한 반인 것을 보면 아마 전쟁 때 갓난 아이들의 희생이 컸는가 싶다. 겨우 살아남은 우리 또래들... 운 좋은 우리들... 어쩌다가 아바이 마을의 학교의 첫 식구가 되었는지, 정통성으로 말하면 청호초등학교의 오리지날 학생이 우리가 아닌가.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 “철수야 영희야 나하고 놀자....”

2학기에는 좀 수준 있다고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남산이 어디 붙어있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이 교과서는 완전히 강요다. 우리 형은 속초초등학교를 다니다가 6학년에 전학을 왔으며 형의 동창들은 같은 동갑내기들이 아니라 전쟁의 후유증으로 나이 차이가 들쑥날쑥 천차만별이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꿈도 꾸지 못했다. 생선 장사를 나가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바쁜 엄마는 아들 입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따뜻한 봄날, 청호 초등학교가 시작되던 날, 나는 작은 외삼촌 집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외숙모가 자기 아들 ‘김상희’를 입학시키면서 보기에 안되었는지 한참 가다가 되돌아와서 나를 강제로 학교로 끌고 갔다. 코를 질질 흘리던 나를 인자한 조영수 선생님에게 맡긴 것이다. 코를 너무 많이 닦아서 코가 헐 정도로... 그때 끌고 간 외숙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외숙모가 우리 둘째 누나를 공부시킨다고 데리고 가서 싫컷 일만 시키서 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 지금도 누나는 그 원망을 한다. 그래서 미안한 나머지 나를 끌고 학교에 간 것 같았다. 나는 공부할 기회를 잃은 누나 몫을 대신 공부하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 첫 입학은 내 인생의 시발점이 되었다. 지금처럼 좋은 동창들을 만난 것이 아닌가? 특히 행운인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우리 동창 중에 다 있었다는 사실,,,, 철수도 있고 영희도 있고.... 또 카페지기 너그런 마씨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글씨를 접하게 된 것은 7살 때 속초중앙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 때였다. 빵을 공짜로 준다는 바람에 교회에 갔다. 빵과 과자와 공책에 유혹이 되어 며칠 나갔다. 그때 어떤 여선생님이 친절하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글씨를 깍두기 공책에 써놓고 글씨를 쓰게 하는데 내 손을 꼭 잡고 배워준 것이 기억난다. 연필 쥐는 법을 배워주고, 쓰고 나면 과자 받고... 이 글이 나의 첫 배움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무조건 배운 것이다. 그 후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이 말씀은 언제나 내 일생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처음 배운 이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엄마에게 효도 한번 제대로 못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좋은 추억들을 남기고 초등학교를 마쳤다. 그런데 중학교를 가야하는데 엄마는 식구가 살기 위해선 학교에 더 이상 가지 말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글만 깨치는 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했다.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6년 동안 한번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운동회, 소풍, 학예회 때도....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조영수, 장옥자, 김현, 함사훈, 최재혁, 조순환 선생님은 우리 엄마가 없는 줄 안다. 가정방문에 가서 만난 적도 없고 온다면 줄행랑...


그런데 선생님들이 나를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엄마를 며칠 동안 찿았다. 어느 날 밤 늦게 장사하고 집에 돌아오는 엄마를 당시 교무인 사상일 선생님과 함께 담임인 조순환 선생님이 기다렸다가 만난 것이다. 우리 오두막 집에 들어와서 엄마와 담판을 진다.

“왜 아이를 중학교에 보내지 않느냐”는 것이다.

“공부를 그만두기에 너무 아깝다(?)”

“그러니 이번만 양보하세요”

“중학교만 보내고 그 다음에 일을 시키세요”...

우리 엄마의 말, "아이 됨매, 우리 굶으면 누구 밥 멕에 줌매" 번역인즉 "안돼요, 우리들이 굶으면 누가 밥을 먹여줍니까?"이다. 돌부처처럼 돌아 앉은 엄마를 설득하기는 역시 선생님들의 제자 사랑이었다. 그 정성과 끈질긴 설득이 우리 엄마의 마음을 돌이킨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너무 고마운 것이다.


중학교만 보낸다는 약속은 중학교 졸업 때 박재앙 선생님에 의하여 또 깨어졌다. 우리 엄마는 “한번 속지 두 번 속지 않슴매”.... 그래도 독신이며 우리 담임인 박재앙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보다 더 많은 설득을 통해 엄마의 승낙을 얻어냈다. 아니 강제로 시험치게 해서 고등학교에 밀어 넣었다.

하여튼 운좋게 나의 공부는 외숙모 손에 이끌러 시작되었으며, 좋은 선생님들의 고집과 현실을 생각하는 엄마 사이에 실랑이 속에 다니게 된 산물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학년 2학기 때부터는 오징어 배를 타면서 공부를 했다. 대학은 마음 뿐이지 꿈도 못 꾸었다. 군에 갈 때까지 배를 탔다. 그런데 오징어처럼 앞으로 가다가 갑자기 또 꺼꾸러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댓글목록

후배님의 댓글

후배 이름으로 검색 2008.06.05 00:00

선배님 좋은글 감사합니다<BR>옛날 추억이 많이 나네요<BR>계속 좋은글 올려 주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