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강냉이 뻥튀기

9,140 2008.04.1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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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릴 때는 간식거리의 종류가 많지 않았다. 60년대 아바이 마을은 길거리가 거의 다 상점이다. 아니 구멍가게다. 두 집 건너 하나 꼴이다. 갯배를 지나서 학교 가는 길에 왜 그리 가게가 많은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길 옆에 가게를 차리면 그래도 밥은 굶지 않아서인가? 먹을 종류도 많지않았다. 아이들 왕사탕 몇 개 빼고는... 거의 다 이빨을 빨리 상하게 하는 것들 뿐이다.

학교로 가다보면 우르르 아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면, 설탕을 녹인 곳에다 소다를 넣고 돌리다가 먹는 ‘찍어 먹기’, 양철판이나 유리판에 놓고 별이나 배 모양의 양철로 누르면 그 무늬 자국을 따라 떼어먹고 그것이 성공하면 또 한번의 기회를 얻는 ‘찍어먹기’가 있다. 그런데 그 ‘찍어먹기’는 날이 추우면 잘 되지만 더우면 빨리 녹고 손의 온기로 말미암아 모양이 되기 전에 녹아 내린다. 보너스 기회를 놓쳐 버린다.

요즈음 아이들도 집에 오다가 문방구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게임에 몰두하나 우리가 찍어먹기에 몰두하나 방법의 차이일 뿐 동심은 다 그런가보다. 학교에서 위생검사하면 이빨이 성한 애가 없다. 우리 동창 중 졸업은 같이 못했지만 왕씨라는 쌍둥이 녀석들이 있었다. 그 애들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벌써 할머니 이빨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학교에 오면 매일 왕사탕을 입에 물고 학교갈 때까지 녹여 먹고 있었으니 그 이빨이 무쇠인들 녹지 않으랴.....

또 우리들이 우르르 송사리 떼처럼 몰렸다가 다시 숨는 기이한 구경거리가 있다. 아니 냄새가 먼저 죽여주는 ‘강냉이 뻥튀기’이다. 언제인가 텔레비전에 한국의 아프리카 선교사들의 주 무기는 성경보다는 친교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강냉이 뻥튀기 기계이다. 아프리카나 선교지 아이들이 이 기계 옆에 섰다가 불에 팽창된 기계가 한계가 이르면 한국말로 “뻥이요”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민방위 훈련처럼 잽사게 숨었다가 ‘뻥’ 소리와 함께 우르르 모여 든다. 이국땅에서 아이들에게 무언가 줄 수 있는, 접합점은 이 방법이 최고라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어려울 때 시절이 생각나서 웃었다.

아바이 동네의 고정 뻥튀기 장사는 성학이내 위, 방파제 초입이다. 검게 그을린 집에다가 흩어진 장작개비 조각들, 그 한편 구석에 얼굴과 옷에 검게 검댕칠이된 아저씨, 언제나 그 장소, 언제나 문열고 들어가면, 얼마 안되는 돈으로도 한 바가지 가득 주는 그 아저씨. 해산물로도 바꿔주는 아저씨이기에 고마운 분이다. 덜 말린 명태와 맞바꾸기를 좋아한다. 아바이 마을에서 통하는 것은 명태뿐 아니라 노가리, 오징어, 도루묵, 꽁치, 양미리 무엇이든지 물물교환이다. 이 아저씨는 단골인 나를 잘 안다. 언제나 현금이 없어 마른 명태 몇을 가지고 문밖에서 서성이면 눈치채고 들어오라고 해서 ‘엄마 말 잘 듣는다지, 그래서 더 주는 거야 ...’ 구수한 냄새만큼이나 격려해주고 한아름 안겨 주는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지 않는다. 10년 이상을 그 자리를 지키다가 무슨 연고로 그만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유일한 간식을 얻는 통로요 칭찬듣는 루트이다.


우리 집은 겨울 저녁이되면, 그 긴긴 밤 등불호야(유리)를 닦고, 심지를 가다듬고, 등유를 채우고, 명태잡이 배들이 들어올 때를 기다려 삯일 작업하기를 기다린다. 우리는 매년 통영에서 명태잡이 원정어업을 오는 ‘백구호’ 선장의 것을 담당했다. 신용을 잘 지키고 누나들이 일을 잘해주어 자기 낙시가 배에서 고기가 제일 잘 물린다나...(허기사 정성을 얼마나 들였는데). 삯일의 품값도 제일 정확하고,,, 서로 서로 득이 되어서 12년을 계속 일했다.

명태 작업선은 기상이변을 제외하곤, 빨라야 저녁 5시, 거의 8시-12시에 배가 들어온다. 그 기다리는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는 당시 소위 ‘깡통라디오’(스피커만 비비선에 연결된 채로 요즘 말로 유선채널이다)의 연속극을 듣는 일이다. 이때 뻥튀기를 먹으면서 다음날 해야할 일 즉, 미끼를 썰어 놓는 일이다. 누나들은 지금 말하면 달인이다. 나는 집에서 칼을 가는 역할을 전문으로 했다. 칼날을 세우는 데는 지금도 일가견이 있다고나 할까. 지루한 시간을 기다리다가 배가 들어오면 그때부터 평균 5시간 내지 6시간의 낙시 고르기 작업을 한다. 파도가 좀 치는 날이면 낙시 고르는 작업이 배나 힘들다. 낙시들이 뭉치로 엉키고 급하게 조업한 흔적이 나타난다. 나머지 삯일 하는 사람들을 배나 힘들게 한다. 좁은 우리 집, 오두막 단칸 방에 그 작업 함지를 4군데 펼쳐 놓으면 잠잘 공간은 전혀 없다. 각자 자기 일이 끝나야 잠을 잘수 있다.(서로 피곤하기에 돌봐 줄 여유도 없다)

그때 일하면서 긴긴밤 먹는 간식이 이 뻥튀기이다.


뻥튀기에 얽힌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군 휴가중 처음 서울에 갔다. 아는 사람을 만나려 가는데 세멘트 레미콘 차가 버스 차창 옆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오버센스) ‘야 서울에는 사람들이 많으니 강냉이도 저렇게 큰 데다가 넣고 돌리면서 굽는구나.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바쁘면 차를 운행하면서 돌리는가?’ 생각했다. 레미콘이 돌아가는 것이 펑튀기 기계가 돌아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는가? 그 어느날 그런 차가 공사판에 머물러서 세멘트를 바닥에 쏟아 놓을 때라야 착각은 깨지고 말았다. 그래서 유치원을 잘 나와야 하는데 나는 유치원도 모르고 자랐으니 생각 수준이 그런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요즈음 유치원 애들에게 레미콘 차를 보이면서 이것이 뻥튀기 기계냐고 물으면 쥐약을 먹었느냐고 할 것이다.

뻥튀기는 어려울 때의 추억을 담고 있기에 어디서든지 반가운 먹거리이다. 아는 사람들과 차를 타고 갈 때 밀리는 장소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뻥튀기 장사. 있으면 슬그머니 차를 세우고 산다. 누가 무식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서 촌에서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해도 좋다. 뻥튀기는 내 인생의 일부이니까....

어느 날 아들이 묻는다. “아빠! 왜 아빠의 실력이나 학문으로 서울 목회 한번 못합니까 고지식하게 이 시골에서만 수절합니까?” 웃으면서 하는 나의 대답은 “나는 뻥튀기는 좋아하지만 뻥튀기 인생은 되고 싶지 않아, 나를 바다에서 불러 써 준 것도 감사한데 무슨 토가 더 필요하냐....”

아들의 아첨성 발언 “내가 그래서 우리 아버지를 좋아한다니까요?” 다 큰 아들에게서 이 소리 듣기 쉽지 않은데...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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