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배의 추억

군대에서 바뀐 운명(4)

12,679 2012.06.11 23:52

본문

교도소에서는 신분 노출을 꺼려해서 좀처럼 세례를 받지 않는다는데 나는 무슨 용기인지 받겠다고 했다. 내가 구원 받은 곳이 교도소인데 그곳 출신이면 어떠냐?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결정적인 장소가 거기니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군인 목사님의 집례로 이루어졌다. 잊지 못하는 것은 1975년 1월 20일, 대한 추위가 가장 극성을 떨던 날이었다. 너무 추워 군인 목사님이 손에 물을 찍어 머리에 얹고 기도하는데 그 사이에 물이 얼어서 머리카락이 떨어지 않았다. 하기사 기념될 날이어야 예수님을 배신도 하지 않겠지?

    드디어 고등법원의 판결이 8개월 만에 이루어 졌다. 2월 14일. 탈영하여 자살 미수로 끝난 강 00 이병의 허파를 뚫은 총알자국이 거의 다 나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재판만이 남았다. 나머지 분대원들은 상고를 포기하고 6개월씩 받은 형기를 다 채우고 나갔다. 할 줄 모르는 어색한 기도이지만 주범인 강이병의 무기징역인 형기가 줄기를 기도했다. 그래야 종범(從犯)인 나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시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엮어 차에 올라타 서울 쪽으로 한참 갔다. 고등법정에 도착하니 강 이병도 묶여서 왔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몇 가지 대질심문을 하더니 법원장이 나에게

“평상시 분대장 전 피고인은 강 이병을 어떻게 보았느냐?”

고 물었다. 나는 순간 지혜를 발했다. 이 시간 강이병을 폄하하거나 범죄자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사건을 우연으로 몰고 갈 필요가 있었다.

“예, 평상시 제가 아는 강이병은 자기 임무를 잘 수행하고 성실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우발적인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심문을 듣고 있던 재판장은 강이병을 보고 묻는다

“평상시 이병 강피고인은 분대장을 어떻게 보았느냐?”

나는 간이 콩알만 해졌다. 그러나 가는 정이 오는 정으로 바뀌었다. 꼭 입을 맞춘 것 같고 짜고 치는 고돌이 같았다.

 “전 하사님은 좋은 분대장입니다. 제가 사고 나던 날도 내 건빵이 썩어 못 먹게 되니 당신의 몫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본 사건의 의도와는 달랐고 묻는 본질과 달랐지만 결과는 좋게 나올 것이라 믿어졌다. 긴장의 순간이 지나고 형기가 재수정되어 언도되었다.

    “강 00 이병, 무기징역에서 5년으로...” 순간 나는 날아 갈듯했다. 아드레날린이 온 얼굴에 휩싸였다. 나의 형기가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분대장 전영택, 1년 징역에 2년 집행유예!”

    즉 오늘 감옥에서 나간다는 이야기이다. 밖에 나가 2년간 조심하면 1년 징역이 면제된다는 것이다. 역으로 범죄하면 지금까지 8개월을 뺀 4개월을 다시 감옥에서 산다는 이야기이다.   
       
    그날 오후 풀려 나왔다. 출감의 기쁨, 자유한다는 기쁨을 뭐라고 표현할까? 하지만 하사가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다. 내 인생이 강등된 것이다. 교도소에서 산 날까지 계산해서 군에서의 생활은 31개월 15일이 되었다. 당시 36개월이면 제대이다. 군법에 의하면 형기를 마치고 군 생활이 4개월 이내면 제대한다. 그런데 15일이 모자라 다시 군대생활을 해서 36개월을 채워야 한다. 이등병을 달고 그 상태로 4개월 15일을 더 버텨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고난이 남았는지? 재수가 옴이 붙었다. 정말 되는 일이 없었다. 대기 발령으로 교도소 영외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명령을 기다렸다.
   
    출감하는 날, 나를 돌아보면서 나름대로 교도소 기념(?) 결심 3가지를 했다. 첫째는 평생 예수를 믿는다. 둘째는 담배를 끊는다. 셋째는 술을 끊는다. 물론 유혹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지켜왔다. 교도소 흔적을 좋게 남겨야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인데, 돌이켜보면 내 삶에 있어 제일 잘한 결심인 것 같았다.
 
    10일 후에 재배치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 트럭을 타고 최전방을 향해 무한정 가는 것이다. 구비구비 돌고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멀 수가 없었다.  강원도 화천, 사창리에 떨어졌다. 2월 중순의 늦추위에 식기도 얼고 숟가락도 씻는 즉시 얼어 붙는 곳이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찬 시선의 영내 생활, 강등된 이병, 교도소 출신을 곱게 볼 리가 없다. 경계대상 1호이고, 왕따 1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군인 목사님 많큼은 반겨주었다. 주일은 물론 새벽예배에도 극성스럽게 나갔다.

 “그래 굳게 참으면 늦게 가는 국방부 시계라도 4개월은 지나가겠지....”

    이등병으로 첫 시련이 왔다. 아니 술을 끊은 결심의 첫 시험대이다. 내무반에서 회식이 시작되었다. 모든 병사들이 술을 먹었고 나에게도 권하였다. 그러나 나는 고집을 쓰고 마시지 않았다. 거나하게 취한 내무반장이 나에게 강권한다. 한잔만 받으라는 것이다. 받긴 받아도 먹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내무반장인 하사는 분대원들 앞에서 내 고집을 꺾어야 체면이 섰던 것 같았다. 그래도 먹지 않았다. 나도 나를 테스트하는 자리였다. 먹지 않는다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엎드려 뻗혀’를 시킨다. 그리고 곡갱이 자루로 엉덩이를 갈긴다. 엉덩이가 불이 났다. 억울하지만 참고 몇 대 더 맞았다. 그러나 맞다보니 나도 오기가 발동했다. 벌떡 일어서 곡갱이 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항명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  “술을 먹지 않는다고 때리는 국방부 규정은 없다” 더 나아가
  “너 이놈! 하사 군번이 몇 번이냐 임마! 너는 군번으로 말하면 새까만 쫄      병이야....”
  “좋아! 나도 병사 한번 잘못 만나 강등되고 콩밥을 먹었는데 너도 내가 사    고 저지르면 너도 별수 있느냐?” 관물대에 있는 총을 집어 들고
  “더 이상 때리면 알아서 해!” 협박하며 세게 나갔다.
  “나를 괴롭히면 너도 집에는 커녕 교도소와 목숨까지도 알아서 해!”

  물귀신 작전으로 나갔다. 세게 나가니 먹혀 들어갔다. 그 후로는 회식자리에서 열외가 되었다. 술을 권하지도 않았다. 새벽기도까지 나가도록 허락받았다. 군인목사님의 특별대우로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 보호아래 있게 되었다. 목사님의 특별한 배려로 마지막 휴가(원래는 되지 않지만...)까지 부대장에게 허락받아 집에 가게 되었다.
   
    휴가 가기만을 고대하고 있던 중, 군에 와서 처음 예수믿고 첫 부활절을 지키게 되었다. 사창리에서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연합으로 야외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군에서는 빵도 준비하고 계란도 삶고.... 하라는대로 이것 저것 준비하고 촛불예배를 드린다고 하니 양초도 준비했다. 드디어 부활절이 되어 밖에서 민간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어두컴컴해서 아직 먼동이 트지 않았다. 촛대에 불을 겨고 드리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은 나는 예배시간에도 두리번 두리번 눈을 살짝 뜨고 살폈다. 처음이니까....  대표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그 때만큼은 나도 눈을 감고 촛불을 숙이고 기도했다. 한참을 기도해도 기도가 끝나지 않는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순간 내 앞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착각했다.
  “부활절에 무슨 성령의 불도 내린다더니 내 앞에도 그런 은혜의 불이 내    리는 거구나”
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더 밝아 오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앗뿔싸!”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앞의 병사가 내가 기울인 촛불에 야전잠바의 뒷부분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얼떨결에 앞의 병사를 꼭 끌어 않았다. 불은 꺼졌다. 갑자기 공격당하고 놀란 일등병이 당황하더니만 내 계급을 보았다. 이등병인 것이다. 아무리 예수 믿어도 성깔은 성깔이고 쫄병은 쫄병이다. 순간 뺨따귀가 날아 왔다. 얼굴에 불이 번쩍했다. 그날이 무슨 날인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아닌가?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잘못한 내가 했다. 그래서 내 일생의 첫 부활절 기억은 성령의 불대신 남의 옷을 태운 바람에 뺨에 주먹세례를 받은 날로 기억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일주일 특별휴가가 주어졌다. 몇 년만의 휴가인가? 존심 상하지만 이등병 계급이라도 좋았다. 집에 간다는 것이 그리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달래가 한참 피는 계절에 나온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강원도의 구비진 산길마다 피어 있는 진달래는 나의 자유를 마음껏 위로해주었다. 눈물로 얼룩진 고향 길.... 바다에서 고기 잡고 돌아 오던 배에서 구성지게 부르는 ‘나훈아’의 노래가 절로 나온다.
 
  “돌담 길 돌아 돌아 또 한번 보고.....”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 길....”

  고향 길 버스가 산길을 따라 구비를 돌 때마다 진달래를 한 아름씩 안겨다 주던 한계령의 풍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흥건히 젖은 눈물이 도착할 때까지 마르지 않았다.  항상 같은 어판 장에서 고기 파는 그 장소의 엄마에게로 먼저 달려갔다. 그 동안 모진 날에도 울지 않았던 설음을 엄마의 품에다 쏟아 놓았다. 솟아 오르는 울음으로 마주 뺨을 부비대며 상봉하던 그 날.....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예정에도 없던 아들이 풀려 나온 것이다. 아니 휴가를 온 것이다. 엄마는 어느 틈에 고기 상자에서 내가 좋아하는 문어 한마리를 들고 있었다. 그날 저녁, 감옥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아들이 좋아하는 문어를 삶아 초고추장에 찍어 먹게 하는 일이다.
 
    세상은 때로 아이러니칼하다. 우리 아들이 아버지 뒤를 따라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해서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군인 목사가 되어 해병대에서 사역을 하면서, 군목에게 사랑을 입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몫을 갚는 것이다. 아들은 평시에도 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지만 군목으로 입대하는 날, 아버지에게 새삼 물었다.

 “아버지! 군에 가서 군목들이 어떤 역할을 하면 제일 좋을까요?” 묻는다.
 
 “권위, 계급, 학벌 세우지 말고 따뜻하게 부드럽게 소외된 병사들을 사랑하    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군에서 바뀐 운명이 2대째 목사의 길을 걷게 하니 누가 우리의 앞길을 예측하리요.....
댓글목록

비아님의 댓글

비아 이름으로 검색 2015.11.11 20:01

멋진 글이었어요. 재밌게읽었습니다. ~^^